‘가시리’ 선 유 (황소자리:2017)

▲ ‘가시리’ 책 표지.
 가시리 가시렵니까 / 버리고 가시렵니까 / 나는 어떻게 살라고 / 버리고 가시렵니까 / 싫어지면 아니올까 / 서러운 님 보내오니 / 가시는 듯이 돌아오소서
 
 고려시대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불린 높고 고운 노래 ‘고려가요(高麗歌謠)’. 어쩐 일인지 현대 우리들에게 통속적이고 음란한 노래처럼 인식된 고려가요는 사실 매우 수준 있는 문학장르였을지도 모릅니다. 삶의 희노애락 속에서 높고 고운 노래를 부르며 사랑하고 살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소망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는 고려의 모든 것을 부정한 위에 세워졌으므로 그 시대의 찬란했던 여러 문화유산들이 혹시 의도적으로 묻히진 않았을까요. 아무튼 민중들 사이에 널리 불렸던 수많은 고려가요 중에 제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은 몇 가지 없는 듯합니다. 그러한데도 조선시대 황진이의 시조부터 김소월의 시에 이르기까지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지요. 이번에 읽게 된 소설 ‘가시리’(선유 글. 황소자리 :2017)는 ‘높고 고운 노래 - 가시리’를 아예 제목으로 삼은 역사로맨스 소설 입니다.

 2017년에 발표된 ‘가시리’를 쓴 작가 ‘선유’는, 사실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역사소설로 한 맥을 형성한 김탁환 작가입니다. 당시 세월호 이야기를 다룬 ‘거짓말이다’와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백범 김구 선생의 청년기를 다룬 ‘대장 김창수’ 등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품고 작업해 왔던 고려시대 사랑이야기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회파 소설을 쓰고 발표하고 독자를 만나는 와중에 결이 다른 사랑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세상에 내 놓기가 왠지 흐름과 다르다고 느꼈던 작가는, ‘선유’라는 필명으로 이 작품을 발표했다고 하네요. 지난 10월, ‘가시리’를 창작판소리극으로 공연하면서 원작자를 밝혀야 하는 바람에 비밀을 공개한 셈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작품의 발견인 듯 흥미로운 파장을 일으켰는데요, 공연 역시 젊은 국악인들로 20여년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해 온 ‘바닥소리’의 노력으로 매우 수준 높게 올려 졌습니다. 잊혀진 옛 노래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다양한 생성과정이 놀라울 뿐입니다.
 
 삶이 참혹할 때 노래는 더 빛난다고 했던가요…. 750년전 이야기예요. 백 년도 못사는 인간에겐 먼 옛날이지요. 대부분은 파괴되고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높고 고운 노래 몇몇이 남아, 그 시절 벅찬 만남과 쓰라린 이별을 들려줍니다. 천 년 전이든, 만 년 전 이든,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그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지구별에 태어났지요.....함께 노래할 근거는 두 가지죠. 이 사랑노래를 아낀다는 것, 그리고 노래의 주인공들만큼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것. (작가의 말)
 
 소설 ‘가시리’는 고려의 항몽 시절 막바지인 750년 전 사랑이야기로 탄생했습니다. 강화도에서 시작해 안면도 진도 제주도를 거쳐 마무리되는 이야기의 여정에는 아청이라는 당대의 최고 가인을 중심으로 ‘좌’와 ‘우’라는 두 벗이자 사랑의 경쟁자가 등장합니다. 사랑은 역시 삼각관계일 때 제일 애틋하면서도 안타까운 걸까요. 특히나 가슴 아픈 삼별초의 항쟁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좌와 우 사이에서 아청의 사랑은 아름다운 노래와 함께 더욱 처철하게 전개됩니다. 등장인물들이 각자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작가는 이야기 내내 그들은 좌, 우, 남, 북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삼별초 항쟁의 여정을 따라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사이사이에 아청과 좌, 우의 옛 에피소드가 튀어 나와 생동감과 이해를 더해 줍니다. 워낙 고증을 철저히하고 치밀한 구성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김탁환 작가라서 그런지, 사랑이야기라고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에만 그치지 않고 사람이 사랑하며 산다는 것에 대해 가슴 깊이 다가오게 하더군요. ‘마음을 얻는 쪽이 이긴다. 사랑도 전투도 마찬가지다. 겹겹이 무장을 하고서도, 말 한마디 노래 한 소절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이 또한 마음이다.(131쪽)’ 라는 구절을 읽다보니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얻는 일, 사회 속에서 첨예하게 다른 입장에 선 이들의 마음과 처지를 알고 받아들이는 일, 지구상에 살고 있는 다양한 존재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 그것이 사랑이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조금 더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렇게 사랑하며 살고 싶은 가을입니다.
 
 사랑노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는 모두 사랑노래다.
이진숙 <동네책방 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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