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문학’을 꽃피우다

▲ 현진건.<그림=강현화>
▲한국적 감수성 고스란히
 
 빙허 현진건은 ‘운수 좋은 날’ ‘빈처’ ‘B사감과 러브레터’의 작가다. 교과서와 한국문학 선집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고, 뛰어난 소설가로 당대에도 이름이 높았다.

 예를 들어, 그와 같이 1900년생인 김동인은 1929년에 ‘조선근대소설고’라는 글에서 현진건을 이렇게 평했다. “우리는 비상한 기교의 천재로 빙허를 들 수 있다. 조화의 극치, 묘사의 절미 - 과연 기교의 절정이다.”

 동시대의 또 다른 중요 작가인 박종화도 “보들보들한 아름다운 글과 사람을 매(魅)케 하는 오묘한 기교는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KAPF계열 작가이자 비평가인 박영희조차도 “빙허는 ‘빈처’에서 사실의 묘사법이 시작되어 ‘타락자’에서 꽃이 피고 ‘불’에서 결실되었다”고 평했다.

 그런가 하면 비평가 백철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조선말에 대한 풍부한 활용과 적당한 사용에 대해서 이 작가를 감당할 사람이 좀처럼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위의 여러 가지 언급들 가운데서도 백철의 비평문은 숙고할 가치가 있다. 현진건은 우리말 표현에 정교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또한 우리말의 용례를 주의 깊게 실험해가면서(!) 소설을 지었던 것이다. 비평가는 그 점에서 “이 작가를 감당할 사람이 좀처럼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현진건이 1900년생이며, 그가 (후기 역사소설들을 논외로 친다면) 자신의 가장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한 시기는 1921년~1925년 사이, 멀리 잡아도 1929년 이전이라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곧 1930년대나 1940년대가 아니었다는 점, 우리나라에 소설이라는 장르가 막 개척되던 초기라는 점 말이다. 다시 말해 빙허가 활동하던 당시는 정치적으로는 물론 언어적으로도 우리말로 소설을 창작한다는 게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보통 1921년작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 1922년작 ‘타락자’세 작품을 현진건의 초기 3부작으로 묶는데, 이 작품들에서 그의 ‘한국적’ 감수성, 곧 전통적 가족(남편과 아내) 관계에 대한 애착과 민족주의적 감수성(식민통치하의 고단한 삶에 대한)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더욱이 섬세한 한국어의 감각까지.
 
 “나도 어서 出世를하여 비단신한켜레쯤은 사주게되엇스면 조흐련만……”
 안해가 이런말을듯기는 참 처음이다.
 “네에?”
 안해는 제귀를못미더하는듯이 疑訝한눈으로 나를보더니 얼굴에 살짝 熱氣가오르며
 “얼마안되어 그러케될것이야요”라고 힘잇게말하엿다.
 “정말그럴것갓소?” 나도 약간興奮하야 反問하엿다.
 “그러먼요 그러코말고요”(‘빈처’, 1921)
 
 현진건은 스물한 살 때인 1920년에 처녀작 ‘희생화’를 발표하고, 이듬해인 1921년엔 ‘백조’동인에 가담한 후 ‘빈처’, ‘술 권하는 사회’같은 뛰어난 작품을 발표했다. 1922년에 첫 창작집 ‘타락자’를 발간했고, 1923년에 단편 ‘할머니의 죽음’을 발표했다. 이 해에 빙허는 조선일보사에서 시대일보사로 직장을 옮기고, 최남선이 주재하는 잡지 ‘동명’에도 편집인으로 참여했다.
 
▲강렬한 민족의식과 ‘조선의 얼굴’
 
 빙허는 그 뒤로도 1924년 ‘운수 좋은 날’‘발’, 1925년 ‘불’‘B사감과 러브레터’등을 발표했고, 스물일곱 살 때인 1926년에는 단편 ‘그의 얼굴’(나중에 ‘고향’으로 제목을 바꿈)을 발표했고, 단편집 ‘조선의 얼굴’을 간행했다.

 ‘할머니의 죽음’은 오랜 노환으로 누운 할머니의 임종을 위해서 모여든 친족들의 심리를 그린 작품이다.

 ‘한머니가 隕命을하시나보다!’ 우리는 번개가티 이런생각을하며 한머니겻흐로 닥아들엇다. 그는담을끌으렁거리며 昏昏히 누어잇섯다. 仲母는 흐르는눈물을 것잡지못하며 그의귀에들이대고 울음 소리로 아미타불과 디장보살을 구슬프게 부르짓고잇섯다.

 한동안 嚴肅한緊張이 여긔잇섯다. 모두 가튼일을 期待하면서.(‘한머니의 죽음’, ‘백조’ 3호, 1923)
 
 염상섭은 이 작품을 두고 “빈틈이 없고, 군소리가 없다”고 했다. 김동인이 “묘사의 절미”라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소설가가 자신이 펼쳐놓은 장면 속에 성급하게 뛰어들어 설명을 늘어놓거나 감정을 직접 드러내면 소설의 극적 완성도는 그만큼 떨어지게 마련인데, 빙허는 이를 극복하고 있어 ‘묘사의 승리’라 부를 만하다.

 비평가 김윤식의 말처럼, 현진건은 주인공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대변한다거나 설명하려는 자세를 버리고, 그들을 무심하고 냉철하게 관찰하는 듯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오히려 더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김윤식, 1997).
‘빈처’. 현진건이 지은 단편소설. 1921년 1월호 ‘개벽’.

 염상섭의 이야기를 더 인용해본다.
 
 현진건의 ‘지새는 안개’(상편)을 보고 나는 문장에만 경의를 표하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죽음’을 보고서는 광희(狂喜)하였다. ‘할머니의 죽음’만은 어디 내놓든지 부끄럽지 않다고까지 생각하였다.
 빈틈이 없고, 군소리가 없다. 오히려 너무 쨍쨍하여서 눈이 부신 것 같은 것이 불평이다. 염주를 들고 앉아서 밤을 새는 숙모라든지, 할머님 앞에서 속으로 울었다 웃었다 하는 주인공의 아름다운 마음과 좋은 성격이 과부족없이 잘 활약하는 것도 좋거니와, 조끼의 단추를 풀고 고름을 풀어젖히는 일절에 이르러서는 까닭모를 황홀한 감을 받았다.(염상섭)
 
 현진건은 1926년 펴낸 단편집 ‘조선의 얼굴’에 ‘할머니의 죽음’을 재수록한다. 그는 ‘조선의 얼굴’에 11편의 단편소설을 실었는데, ‘조선의 얼굴’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없다. 다만 수록 단편 ‘고향’의 한 구절이 그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곧 “나는 그눈물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얼골을 똑똑이본듯십헛다”라는 내용이다. ‘그 눈물’이란 바로 일제에 의해 토지를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 방황하는 농민들의 참상이요, 조선의 처참한 실상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동척(東拓)’ 때문에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음을 분명히 하며, 이러한 가난과 고통의 원인이 일제의 지배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현진건은 문학적 기교만 뛰어난 작가가 아니라 강렬한 민족의식을 가진 작가였다.
 
 그는 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일 때 손기정 선수 사진의 일장기 말소 사건에 공범으로 연루돼 1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기도 했고, 그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정간을 당하면서 생업을 잃었으며, 결국 언론계에서도 영영 떠나야 했다. 이후 현진건은 ‘무영탑’등 역사소설에 중점을 두고 작품 활동을 펼쳐나가면서 ‘흑치상지’를 계기로 최남선의 민족주의에서 신채호의 저항적 민족주의로 이동한다. ‘흑치상지’는 몰락한 백제 유민 흑치를 민중의 영웅으로 묘사하는데, 백제는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선을 비유한 설정이었다(양진오, 2008).
 
 이에 일제는 1940년 ‘흑치상지’연재를 강제로 중단시키는 한편, ‘조선의 얼굴’마저 금서로 묶어버린다. 설상가상 양계와 기미(쌀과 관련된 선물거래) 사업을 하다 파산한 현진건은 이 해에 경제적으로 급속하게 몰락한다. 하지만 그는 창씨개명 요구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일제에 굴복하지도 않는다. 그의 말년은 병들고 쓸쓸했다. 그는 44세이던 1943년에 외동딸을 혼인시킨 뒤 지병인 폐결핵과 장결핵으로 별세했다.
김동인, 김동환, 최학송, 최진람, 김일엽 등과 함께. 앞줄 맨 왼쪽에 앉은 이가 현진건이다.
 
▲빙허를 성숙하게 만든 친형
 
 문학과 삶에서의 일제에 대한 현진건의 저항의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의 셋째 형 정건의 영향을 말해두지 않을 수 없다.

 현진건은 1900년 대구 계산동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역관을 많이 지낸 부유한 중인계층이었다. 위로 세 형이 있었고, 그 자신 10대 후반에 일본과 중국 상해에서 차례로 유학한 엘리트였다. 중국 상해에는 그의 셋째 형 정건이 있었다.
 
 상해에서 사회운동을 펼치던 현정건은 1921년 5월 상해 프랑스 조계 내에서 개최된 ‘전한공산당 대표회’에 상해 대표 자격의 대의원으로 참석했다. 이 대회에는 주로 한국 국내, 중국, 만주, 일본 등지의 한인 공산단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대회참가자들은 한국 사회주의운동을 지도할 최고기관인 고려공산당이 성립됐음을 선포했다(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2003).
 
 현정건은 1924년 상해에서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인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1927년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국내로 압송돼 1929년 징역 3년을 언도받았다. 1932년 평양 형무소에 수감 중 만기 출옥하지만 출옥 6개월 만에 고문과 옥고 후유증으로 병사하고 만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죽은 다음 해인 1933년 자살했다.

 3·1운동은 ‘한국 사회주의의 어머니’라고도 불린다. 사회주의는 1919년 이래 한국의 일대 유행적 사조가 됐던 것이다(임경석, 2003). 1918년과 1919년 사이 상해 호강대학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해 공부하던 현진건이 형 정건을 만나 상당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현진건이 그의 형처럼 사회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영달과 안위를 포기하고 민족해방에 투신한 친형의 자기희생적 삶은 세상을 바라보는 현진건의 시선을 성숙하게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그가 초기작 ‘빈처’에서 아내가 신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괴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면서 “그의 사랑이야말로 이기적 사랑이 아니고 헌신적 사랑이었다”라고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현진건은 ‘퇴폐·비해·동경’으로 상징되는 낭만파 ‘백조’의 동인에서 출발했으나, ‘조선주의’라는 민족주의사상을 깊이 추구한 작가였고, 처참한 ‘조선의 얼굴’을 사실적 기법으로 그려낸 작가였으며, 그것을 통해 인본주의를 한껏 드러낸 작가였다.

 그러기 위해 빙허는 조선땅을 단단히 딛고 서서 ‘낭만에서 사실로’ 과감히 이행했던 것이다. 다음은 빙허 자신의 말이다.
 
 시간과 장소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치 못하는 것이다. 달나라의 소요도 그만둘 일이다. 구름바다의 유희도 그칠 일이다. 조선문학인 다음에야 조선의 땅을 단단히 디디고서야 할 줄 안다(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 개벽, 1926).
 
 [참고문헌]
 한국현대소설사(최신증보판, 김우종), 성문각, 1992
 김윤식 교수의 소설 특강1, 한국문학사, 1997
 한국소설사(개정증보판, 김윤식·정호웅), 문학동네, 2000
 현진건 단편 전집, 가람기획, 2006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양진오), 역락, 2008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개정판, 임경석), 역사비평사, 2014
글=문수현·그림=강현화
 
 ※글쓴이 문수현은 전북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현재 전북교육신문 기자.
 ※그린이 강현화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지금은 시골살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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