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갈구한 자식들 앞에서 오열
자식·남편 잃은 어머니의 독한 사랑

▲ 연극 ‘사랑을 주세요.’. 왼쪽부터 제이, 아리, 벨라, 에디, 어머니.<극단 바람직 제공>
 제목이 멋지지 않은가. ‘사랑을 주세요’라니. 이 문장에서는 두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누군가 사랑을 갈구하는 이가 있다는 것과, 그 대상이 사랑을 쉽사리 주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여기에서는 사랑을 갈구하는 이보다는 쉽사리 사랑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이에게 더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왜 사랑을 주지 않으려고 할까.

 극단 ‘바람직’이 11월 초에 올린 연극 ‘사랑을 주세요’는 닐 사이먼의 작품으로 원제는 ‘Lost in Yonkers’이다. 연극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닐 사이먼은 셰익스피어에 비견될 정도로 유명한 미국의 극작가이다. 그는 1961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토니 상을 비롯해서 수많은 상을 탔다. 브로드웨이에서는 그의 작품이 일주일에 8번 올라간다는 통계도 있다. 살아있는 극작가로서는 유일하게 그의 이름을 딴 극장도 있다.

 이런 닐 사이먼의 작품을 한다고 하니 관심이 갈 수밖에. 11월9일, 토요일 오후 첫 공연을 보러 궁동예술극장을 찾았다. 무대 오른쪽에 의자가 하나 있는데, 누가 봐도 중요한 사람이 앉는 의자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가운데에는 소파가 있다. 이 소파는 나중에 넓게 펼쳐져서 침대 역할을 한다. 왼쪽 뒤로도 탁자와 의자가 있다. 한 집안의 거실 풍경이다. 자, 이제 이 거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내를 병으로 잃은 에디는 돈을 벌기 위해 남부로 떠나야 하고(참고로 융커스는 북부에 있다.), 열 셋, 열 여섯 두 아들을 맡기러 어머니 집에 온다. 하지만 에디의 어머니는 아들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렇지 않아도 괴팍한 할머니와 살기 싫었던 에디의 두 아들은 아무런 대책 없이 무작정 좋아하는데 에디의 여동생 벨라가 폭탄선언을 한다. 조카들이 떠나면 자기도 떠나겠다고.
 
▲미국 유명 극작가 닐 사이먼 작품
 
 ‘사랑을 주세요.’는 이렇게 한 집에 살게 된 벨라와, 벨라의 두 조카, 그리고 벨라의 어머니가 펼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에 벨라의 또 다른 오빠인 루이와 벨라의 언니 거트가 끼어든다. 이 연극은 1942년 융커스가 배경이다. 42년이면 세계는 전쟁 중이고, 그 전에 이미 한 번 전쟁이 있었다. 벨라와 에디, 거트, 그리고 루이의 어머니인 이 극의 주인공은 끔찍한 전쟁을 두 번째 겪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유대인이고, 독일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원래는 아이가 여섯이었지만 지금은 넷만 남았다. 남편은 집을 나갔고, 홀로 네 아이를 키웠다.

 닐 사이먼이 유명하긴 하지만, 2018년에 작고한 그의 작품을 광주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반갑기도 했지만, 오래된 외국 작품을 무대에서 만나러 갈 때는 늘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이 작품인가? 연극을 다 본 후, 작품을 선정해서 애쓰고 올린 이유가 명확하게 오지 않으면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마 더 긴장하면서 무대를 지켜봤던 것 같다. 왜 오늘 하필 이 작품인지 알고 싶어서.
연극 ‘사랑을 주세요.’의 벨라, 거트, 제이, 루이.<극단 바람직 제공>

 그런 나의 긴장을 풀어주고 싶은지 연극에는 코믹한 요소가 많았다. 닐 사이먼이 코믹한 소극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미국 대중극 혹은 상업극에서 그 이름이 드높은 사람이다. 그런데 1940년대의 미국식 유머가 통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나처럼 긴장한 사람이 많은 건지 관객들은 별로 웃지 않았다. 연출가가 땀 꽤나 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으라고 던져주는 대목에서 관객들이 웃지 않으면 얼마나 민망하고 초조할까.

 극단 ‘바람직’은 이 무료 공연을 총 세 번 올렸다. 첫 공연을 보고 마지막 공연을 한 번 더 보러 갔다. 코믹한 요소가 많았지만 마지막에 묵직한 울림을 준 어머니(혹은 할머니)의 오열을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극단 관계자 말이 두 번째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많이 웃었다고 한다. 마지막 공연에서도 관객들이 많이 웃었다. 드디어 통한 것일까.
 
▲사랑을 갈구하는 이들은 자식들!
 
 이 연극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이는 자식들이다. 그리고 쉽사리 사랑을 주지 못했던 이는 어머니다. 사랑을 주지 않았다기보다는 어머니만의 방식대로 사랑을 주었다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어머니는 힘든 삶을 살면서 자식들을 독하게만 키웠다. 어떤 자리에서든 혼자 일어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인간을 만들려고 했다. 어머니의 그런 강퍅함은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자식들은 어머니에게 다정함을 요구했는데 어머니는 그런 유약한 사랑은 줄 수 없었다.
연극 ‘사랑을 주세요.’. 어머니의 모습.<극단 바람직 제공>

 연극이 진행되면서 어머니는 자식들의 마음을 알아가고 끝내 오열을 터뜨린다. 자신의 지난 세월이 그녀를 덮쳤으리라. 독일 군에게 아버지를 잃고, 남편이 떠나간 빈자리에서 아이 둘을 잃고 남은 자식들을 지켜 낸 그 세월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자식들이 원하는 다정다감한 사랑을 주지 못했던 그 세월이 무슨 의미였는지 생각하니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으리라. 어머니의 오열은 관객들에게도 전염되어 훌쩍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1940년대의 미국식 코미디는 통하지 않는다는 편견은 연극을 한 번 더 본 후에 깨졌고, 극단 ‘바람직’이 2019년 11월 오늘 하필 이 연극을 올린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이해를 했다. ‘사랑’이라고 하는 인류 보통의 정서는 2019년에도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과 연극 연습을 병행하면서 훌륭한 공연을 올린 직장인 극단 ‘바람직’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한다. 벨라 역과 어머니 역이 특히 훌륭했다고 하고 싶지만 에디와, 루이, 거트도, 에디의 두 아들 역이었던 아리와 제이의 연기도 훌륭했으므로 특정 인물에게만 칭찬을 할 수가 없는 점 양해 바라면서.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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