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모든 삶이 핀다”

 20년이 넘게 지났다. 그의 몸의 세포들은 ‘탐험’이란 말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말의 떨림을 몸이 기억하는 것인데, 탐험이란 말 속에는 모래 언덕 같은 황량한 삶의 의미들이 놓여있다. 가면 돌아올 수 없는 땅들을 걸으며 그는 사람의 삶을 들여다봤다. 낙타처럼 끝없는 모래 위에 점의 발자국을 찍으며 혼자 걸어가야 하는 것이 사는 일이다. 사람은 늘 혼자다. 탐험도 다르지 않다. 곁에 누군가와 같이 걸어도 결국엔 혼자다. 길의 시작과 끝을 채우는 것은 오직 개인의 의미다.

 그의 직업은 탐험가다. 탐험이란 것이 생계와 무관한 일이어서 아주 잠깐씩 다른 일에 몸을 걸친 적은 있지만 늘 그라는 사람을 규정하는 직업은 탐험가였다. 세계 최초로 시베리아 ‘초원의 길’ 1만2000㎞를 모터사이클로 횡단한 사람, 김현국(44) 씨다. 그래서일까? 그의 곁에 있으면 몸에서 바람 냄새가 난다. 그는 바람들이 지나갔던 길목을 따라 걸었고, 그 길 위에서 다른 길을 만들었다.

 그가 새로운 탐험의 길을 기획하고 있다. 2005년 7월4일의 일이다. 아시아지역 32개 국가를 연결하는 국제 자동차 도로망인 ‘아시안 하이웨이’(Asian Highway)가 효력을 발생하게 됐다. 무려 55개 노선이 하나로 연결돼 있으며 길이는 14만㎞에 이른다. 그 길에 ‘AH6’ 노선이라는 게 있다. 부산과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를 넘고, 하얼빈과 이르쿠츠크를 건너간 다음 노보시비르스크를 찍고 모스크바에 닿는다. 길은 다시 확장돼 유럽 16개국과 연결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끝난다.

 ‘AH6’은 길의 처음과 끝이 2만4000㎞다. 대형 컨테이너를 실은 트레일러를 타고 그 길을 횡단하는 것이 그가 올해 계획하고 있는 탐험이다. 이름하여 ‘AH6, 트랜스 시베리아 2010’인데, 길의 중간에 시베리아가 놓여있다. 단순한 탐험이 아니다. 물류와 문화의 새로운 이동 통로에 대한 발견이며 가능성에 대한 실험이다.

 탐험, 그 피할 수 없는 떨림

 늘 그랬다. 그에게 탐험은 ‘발견’이었다. 그가 처음 탐험을 시작한 땅은 인도다. 전남대 법대에 입학해 고시를 준비하던 때다. 지금은 도대체 왜 인도에 갔었는지 기억조차 선명하지 않다. 가서는 돈 한 푼 없는 이방인의 신세로 남의 땅을 서성였다. 잠은 길에서 잤고, 먹을 것은 식당 일로 구했다. 그렇게 1년6개월을 살았다. 인도가 조금씩 보였고, 그곳을 몸으로 알고 싶었다.

 아직 기억한다. 티벳 라마승들의 얼굴. 문화 충격, 그 자체였다. “처절한 고행이 장엄했다. 라마승들은 얼굴 가죽이 하얗게 도드라져 있다. 하루에 감자 하나만 먹으며 모든 힘을 일깨우는 데 바친다. 그저 편안한 얼굴로 ‘오체투지’를 하는 그들에게서 말이 아닌 몸의 수행을 봤고, 스스로 낮아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읽었다.”

 눈의 발견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음으로 발견해 내는 것들은 내적 떨림과 연결되는 것이어서 몸을 움직였다. 인도에서 돌아온 뒤 그는 지도만 봤다.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 시야를 넓혔다. 세상은 아득히 넓었고, 가야 할 곳도 많았다. 만나야 할 것들은 언젠가 기어이 만나게 된다. 그것이 사람이건 땅이건 나무이건 상관이 없다. 지도를 벗어났을 때 실체가 있고 진정한 떨림이 시작된다.

 그는 시베리아에 꽂혔다. 두려움의 땅, 막연한 동경이 살아있는 땅. 혹독한 추위와 대자연, 그 속으로 스미고 싶었다. 전부를 걸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삶이고, 탐험도 다르지 않다. 그는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일에 남은 일생을 걸어보기로 했다. 자청한 고난이었으므로 두렵지 않았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에 목숨을 담보로 걸었다.

 

 생존확률 ‘0’, 극한의 시베리아

 그가 꿈꾼 시베리아 탐험은 모터사이클 횡단이었다.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러시아당국이 그의 탐험을 불허했다. 반대는 처음부터 완강했고, 쉽게 누그러지지도 않았다. 어쩌면 당연했다. 모터사이클로 그 길을 횡단하는 일은 생존확률 ‘0’이나 다름없었다. 그 땅을 잘 아는 러시아 사람도 들어가면 살아 돌아오기 힘든 길이다. 혹독한 추위와 맹수들의 습격은 빈틈이 없다. 시베리아는 극한의 땅이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이 스물을 넘어 처음으로 전부를 걸었던 일이었다. 러시아 경찰서와 세관, 시청을 몇 달 동안 헤집고 다녔다. 길은 닿을 듯 또 멀어졌다. 끝내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포기라는 말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할 때 도움의 손길이 왔다. 미국인 선교사들이 러시아 당국에 건의를 했다. 횡단 허락이 떨어졌다. 다만 조건이 붙었다. 러시아 사람 한 명과 초반 2000km를 동행할 것. 순간 그의 머릿속에 1만2000km 시베리아가 펼쳐졌다.

 “그 때 알았다. 탐험은 포기 위에 세우는 마음이다. 어떤 탐험의 계획을 세우고, 실행으로 옮기기보다 주저앉을 때가 더 많다. 그러나 한 번도 포기한 적은 없다. 마음에 그것을 담고 있는 한 언젠가는 갈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 때 그는 하바로프스크를 출발했다. 모스크바와 우크라이나를 거쳐 흑해에 도달하는 길이었다. 역시나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 길은 늘 두려웠고, 공포에 닿았다. 매일 포기와 완주 사이에서 갈등을 했고, 그는 모래 사막 위의 한 마리 낙타였다. 처음부터 탐험에 끝은 없었다. 시베리아 모터사이클 횡단도 그랬다. 그는 흑해에 닿지 못했다. 흑해를 바로 목전에 둔 우크라이나의 빗길 속에서 큰 사고를 당했다. 죽지 않을 만큼 다쳤고, 현지에서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진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AH6, 트랜스 시베리아 2010’

 사람은 이동을 통해 삶의 문화들을 피워냈다. 이동의 길에서 변화가 시작됐고, 전부를 바꾸는 미약한 흐름이 전개됐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 이후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탐험했다. 그리고 ‘세계탐험문화연구소’를 세웠다. 그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탐험은 지구의 가치들에 대한 실험이다. 지구는 먼저 사람의 이동이 있었고, 변화에 닿았다.

 그의 생각은 늘 길 위에 있다. 길은 모든 혁명이 완성되는 영토다. ‘AH6, 트랜스 시베리아 2010’ 역시 다르지 않다. 2010년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다. 한 세기를 넘어 세상이 달라졌다. 100년 전 그 길이 정복의 길이었다면 지금 그 길은 ‘소통’의 길이다. 물류를 통해 생계가 교류하고, 문화를 통해 생각이 마음을 나눈다. 컨테이너를 실은 대형 트레일러는 물류를 상징하며 함께 떠날 비보이 공연단은 한류의 세계적 소통을 의미한다.

 ‘AH6’은 우리의 입장에서 막힌 길이다. 분단이 길을 막고 있다. 모두 육로이지만 현재로서는 바다의 길을 잠시 빌려야 한다. 길이 막혔기 때문에 물류의 이동은 선박 운송이 대세다. 배로는 같은 길을 가는데 60일이 걸리지만 트레일러가 움직이면 20일이면 된다. 길이 열리면 희망이 열리고, 생각의 전환도 함께 열리게 된다.

 “‘AH6’ 노선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함께 한반도로부터 시작해 유럽의 끝을 연결하는 매력적인 길이다. 냉전은 끝났고,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물류와 문화가 이동한다. 한반도는 해양과 대륙을 연결하는 핵심의 지점에 있다. 다만 분단으로 인해 고립된 섬의 형국이다. 언젠가 길은 완전히 열릴 것이고, 미리 사람과 물류가 원활하게 움직이는 이동로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탐험의 이름으로 길 위에서 그가 보낸 시간이 20년을 훌쩍 넘었다. 이제 그의 눈엔 개인이 아닌 전체가 보인다. 한국처럼 길이 중요한 나라도 없다. 우리의 경제는 원자재를 수입한 뒤 재가공해 수출하는 형태다. 모든 생계가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길은 사람을 엮고, 물건을 엮고, 문화를 피운다. 모든 삶은 길 위에서 핀다. 그는 그렇게 믿는다.

 글=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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