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림동 '오부함석'

함석이 우리나라의 주택양식 속으로 들어온 것은 일제시대다. 아직까지도 함석을 다루는 연장이나 작업 용어는 모두 일본어이며 기술을 전수한 것도 일본인이었다. 함석이 일반의 주택에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초반으로 새마을운동 직후였다.
온 나라가 집을 뜯어고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대대적인 집 고치기가 행해졌던 70년대 초가지붕이 대부분 함석으로 바뀌었다. 함석집들이 최고의 호황기를 걸었던 것도 그 시절이다. 광주에만 150여 곳에 달하는 함석집이 있어 웬만한 동네는 모두 함석집을 끼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고작 10여 곳 남짓한 함석집이 남아 있을 뿐이며 설사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하더라도 예전의 함석집과는 다르다. 지금은 영세 규모를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모두 대형 기업화돼 있다.
양산동에서 30여 년의 시간을 함석집으로 버텨낸 `오부함석’은 새마을운동 시절에 만들어졌다. 처음 가게를 차렸던 사람은 벌써 2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현재는 그의 밑에서 기술을 배웠던 이경훈(47)씨가 가게를 꾸리고 있다.
“처음에는 뭐 말할 거 없이 잘 되얏제. 고치는 집이 어디 한 둘이었어야지. 지붕에 차양, 배수통까지 집에 들어가는 것이 모도 함석이었응께. 요 일이 일일이 규격 재서 짜맞추는 일이라 시간이 걸린께 손님이 와도 일을 못해주는 경우도 다반사였제.”
8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함석은 여전히 호황이었다. 함석제품을 거의 쓰지 않는 양옥집들이 속속 등장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옥이 주류였다. 게다가 연탄 보일러 연통 수요가 꾸준했다. 독한 가스로 인해 함석에 금방 녹이 나고 몇 년 지나면 금방 또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요새는 칼라코팅된 스뎅(스테인리스) 함석이 나와서 녹도 안 슬지만 옛날에는 어디 그래. 금방금방 바꾸니까 큰 공사는 아니어도 수입이 꽤나 짭잘했제. 글고 차양 보수공사도 솔찬하게 있는 편이었제.”
함석이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은 것은 90년대 중반이다. 초반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장사가 되는 편이었다. 가게가 터를 잡고 있는 양림동이나 양동, 계림동, 산수동, 방림동 등 여전히 한옥이 주류를 이루는 마을들이 많이 남아있어 함석 공사는 꾸준했다. 그러나 모든 집이 기름보일러로 교체되고 아파트가 보편화되면서 함석의 쓰임은 거의 사라졌다.
최근에는 대형 에어컨이나 히터의 송풍구 작업이 전부이다. 그나마도 대형 기업들이 모두 점령하고 이씨는 겨우 몇 달에 한 건 정도이며 아직도 한옥 차양 보수공사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몇몇 단골을 제외하면 손님도 거의 없다.
“인자 함석은 종점에 다 와 부렀제. 낙후된 지역도 모도 재개발한다는디 누가 함석으로 차양 짓고 배수구를 만들겄어. 나는 중학교 졸업하고부텀 함석만 만져놔서 다른 기술이 없응께 아직까정 요놈 붙들고 있는 것이여.”
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