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 서광라사

한때 웬만한 거리마다 양복점 간판 하나씩은 걸려있던 시절이 있었다. 단지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라 양복 만드는 기술 하나면 평생 밥벌이가 `따논 당상’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당시에는 기성 양복을 파는 곳이 전무했고, 세상의 모든 양복들은 양복집 점원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기성복이 시장을 평정하면서 맞춤양복은 변두리로 밀려났다.
서동 서광라사는 30년의 시간을 양복점으로 짱짱하게 버텨왔다. 가게의 역사는 30년이지만 주인 김남길(50)씨가 양복을 만들어온 시간은 여기에 5년을 더 보태야 한다. 초등학교 졸업장을 끝으로 학교를 떠나 양복점 `꼬마’로 맞춤양복계에 입문(?)한 그는 치수 재고, 가봉 틀고, 박음질하는 일로 평생을 살았다.
가게가 처음 생겼던 70년대 서광라사가 위치한 서동 골목은 양복과 양장점들이 몰려 있었다. 손님도 끊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졸업이나 입학만 해도 양복 선물이 기본이었고, 예단비라는 것이 없어 결혼식이면 사돈네 팔촌까지 양복을 맞춰 주었다. 당연히 가게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처음 외숙이 하던 때는 점원 7, 8명을 두었고, 79년 그가 가게를 인수한 다음에도 3명의 점원이 있었다. 한 달이면 대략 40여 벌의 양복을 맞춰 손 쉴 틈이 없었다.
“그때는 말도 못했지, 점원으로 일하려고 해도 아무나 안 받아주던 시절이었으니까. 아, 그때는 양복집이 극장 광고에 등장하고 했잖어. 요 근처에 양복집만 스물 아홉군디가 있었는디 모도 다 잘됐으니까. 요샛말로 양복집이 최고 유망직종으로 꼽혔어.”
80년대 들어서도 꾸준한 매출을 기록하던 양복집들이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시장에 기성복이 등장하면서부터다. 광주에 백화점들이 속속 등장하고 기성양복 집들이 문을 연 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는 줄곧 내리막길이다. 현재 젊은 사람들은 아예 양복점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고 손님은 대부분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다. 게다가 가게는 광주에 있지만 손님은 시골 사람들이 더 많다.
그나마 서광라사가 하루도 가게 문 닫는 일 없이 꾸준히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단골이 많이 확보돼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뜨내기손님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가게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나 시골에 사는 단골들이 올라와 일감을 맡기는 경우가 가장 많다.
“한 구십 프로는 단골 장사제. 글고 아직도 나이 자신 분들 중에는 맞춤양복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어. 암만 해도 기성복은 편하게 입을 수는 있는디 몸에 착 달라붙는 느낌은 덜 하제. 근께 우리집이서 옷 해 입은 사람들이 또 오고 그래.”
가게가 오랜 세월 꾸준히 버텨오다 보니 가게를 채운 물건들에도 꽤나 오랜 세월이 쌓였다. 발로 밟아 돌리는 재봉틀은 25년, 여전히 110볼트 전선을 달고 있는 다리미는 20년쯤 되었다.
“발로 밟아서 쓸라면 귀찮기는 한디 저것을 고집하는 이유가 따로 있제. 전기로 하는 것보담 저것이 바느질이 곱게 나오거든. 양복쟁이가 젤로 중요한 것이 고것 말고 또 있겄어.”
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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