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동 `대동유리’

오래된 이발소에는 반드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하는 푸쉬킨의 시가 허름한 벽면 한구석을 채우고 있다.
<최후의 만찬> 그림이나 호랑이, 가화만사성이란 글자, 태극기 등이 담긴 액자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다. 선물이나 장식용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가면서 웬만한 유리 가게들은 모두 그런 류의 액자를 판매했다. 그러나 현재는 몇몇 시골집을 제외하면 그런 액자가 걸려 있는 풍경을 찾기가 쉽지 않다.
대인동에서 30년의 시간을 견뎌온 `대동유리’에는 아직도 그런 액자가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때 이사나 개업선물로 가장 많이 팔렸던 `축 발전’ 글귀가 선명한 거울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주인 윤홍선씨가 가게를 차렸을 때만 해도 유리 제품이 상당한 호황을 누렸다. 이사선물로 기껏 성냥이나 하이타이가 주류를 이뤘으니 만큼 가격대도 결코 싼 편이 아니었지만 70~80년대 거울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가장 선호하는 개업 선물이었다.
“거울은 한 개 사 놓으면 못 해도 20년씩을 쓰잖아, 지금도 어디가면 개업 선물로 받은 거울이 걸려있는 집도 많고. 70년대 중반에 시골에서 올라와 가게를 열었는디 거울이 무척 잘 팔렸제. 그때는 개업선물이 시계 아니면 거울이 전부였응께.”
현재는 하루 종일 앉아 있어봐야 만 원짜리 한 장 구경하기가 쉽지 않지만 당시에는 거울과 액자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하루 10여 개는 기본이고 손님이 몰린다 싶으면 30개도 금방 팔려 나갔다. 더구나 당시에는 가정집들로 급속하게 유리창이 보급되기 시작해 배달로 팔리는 유리 주문도 상당했다.
“하여간 가게에 하루 종일 있으면 가만 앉아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제. 그냥 팔문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요 것들이 전부 선물용으로 팔려 나가니까 포장도 이삐게 해줘야 해. 아침부터 밤까지 손님들 신경쓰다 보문 밥도 못 묵고 일하는 날도 많았제.”
유리제품이 급속한 퇴조를 보인 것은 90년대 초반이다. 개업이나 이사 선물로 거울이나 액자를 선물하는 풍습 자체가 사라지고, 사람들의 취향이 변화하면서 현재는 사양길을 한참 더 지나와 버렸다. 그나마 터미널이 대인동에 있을 때는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간간이 들러 매출을 올려 줬지만 광천동으로 옮겨간 다음부터는 뚝 끊겼다. 지금은 깨진 유리를 갈아주는 몇몇 단골과 연세 지긋한 사람들이 간간이 찾아오는 정도다.
“가게에 한달을 앉아 있어도 젊은 사람들 보기는 힘들어. 요새 누가 요런 거 선물할 사람이 있어야제. 그래도 나이 자신 분들은 가끔씩 이용하니까 포도시 밥은 묵제. 인자 딴 일 찾아보는 게 순서일 거 같은디 평생 해묵은 것이 요것이라 뾰족한 수가 안 떠올라.”
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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