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동 `월남표구’

고가의 예술 작품들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다. 나라 경제가 부동산 경기로 흥청이고, 대규모 개발로 곳곳에서 졸부들이 탄생하던 70∼80년대 이야기다. 글씨나 그림 등 작품이 인기를 끌면서 덩달아 표구점들이 무더기로 생겨났고 모두 호황을 누렸다.
`월남표구’는 80년대 초반 농장다리 부근에서 문을 열어 지금껏 22년의 시간 동안 한자리를 지켜왔다. 현재는 농장다리에 표구점들이 몰려 있었다는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80년대 초반만 해도 20곳 가까운 표구점들이 진을 쳤다. 그리고 그 행렬은 띄엄띄엄 이어져 예술의 거리까지 닿았다.
“지금은 나 혼자 남았는디 옛날에는 여그에 표구점이 겁나 많았어. 지금도 그 많던 표구점들 이름이 전부 생각나. 하기사 여그만 몰려 있었던 것도 아니제. 그때는 표구할라고 사람들이 줄을 선께 웬만한 동네에 하나씩은 있었지”라는 게 주인 이효정(69)씨의 말이다.
80년대까지 표구점들은 최고의 호황기를 누렸다. 특히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선물로 고가의 예술 작품을 주고 받는 게 인기였다. 보통 사람들도 거실에 한 두 개의 작품은 걸어놓고 있었다.
“표구는 70년대가 젤로 잘 나갔는데 그때는 내가 시골에서 농사지었응께 잘 모르겄고, 80년대도 손님이 솔찬히 많았제. 아시안게임 하고 올림픽 끝나고까지 예술 작품들이 잘 나갔응께.”
표구의 수요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IMF 직전이다. 예술품들이 거의 고가이다 보니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고, 나라 경제가 침체의 길을 걸으면서 거래 자체가 거의 사라졌다. 현재는 손님이 많지 않아 풀 한 봉지를 사면 몇 달을 쓰고 있을 정도이다.
“오랜만에 일감이 하나 들어와서 풀을 찾아본께 곰팡이가 풀풀 날라가. 요 정도문 더 말할 것도 없제. 한 달에 서너 개만 해도 일감이 많이 들어온 편이제. 어쩔 때는 몇 달 동안 손님이라고는 코빼기도 못 볼 때가 있응께.”
그나마 가끔씩 찾아오는 손님도 제작보다 수리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가게 자체가 시내 중심가가 아닌 외곽에 있기 때문에 단가도 절반 가까이 낮다. 새롭게 표구 짜고 글씨나 그림에 누렇게 낀 때까지 제거하는 데 3만원이 전부다.
“표구 하나 할라문 신문, 방수지, 창호지, 비단을 앞뒤로 아홉 겹을 발라야 써. 수리라도 많으문 괜찮은디 어쩌다 온 사람도 기껏 맡기고 찾아가덜 안혀. 가게 한다고 먼 돈이 되겄어. 가만 앙거있기 뭐한께 걍 요놈이라도 지키고 있는 것이제.”
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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