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동 `청송이발관’

그 집에는 아직 옛날식 이발 의자가 있다. 어디 그 뿐이랴. 벽 한 귀퉁이에는 아이들 키높이를 맞추는 나무 합판 의자도 세워져 있다. 이발을 끝내고 머리를 감는 세면대의 양은 세숫대야도 옛날 그대로다.
붉은 벽돌에 `쓰레트’ 건물 자체에서 이미 오래된 시간의 향기가 느껴지지만 청송이발관이 견뎌온 세월은 상상의 폭을 훨씬 뛰어넘는다. 50대 후반의 아저씨가 머리를 자르며 “여가 나 중핵교 댕길 때부텀 맨나 머리 짜르던 곳인디 아직도 있당께”라는 말을 뱉어내는 일이 예사로 일어나니 더 부연할 필요가 없다.
더 큰 놀라움은 이발관이 있는 장소가 시골 구석진 곳이 아니라 광주라는 것. 청송이발관의 역사는 40년쯤(수차례 주인이 바뀌어 아무도 정확한 개업년도를 모른다) 되었다.
“요 인근에 사는 누구한테라도 잡고 물어봐. 요 이발관 모르는 사람은 암도 없을 것인께. 건물은 요라고 다 쓰러져 가지만 원차 오래 해분께 명소가 되야 부렀제”라는 게 주인 주영칠(56)씨의 말이다.
그곳이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로 오랜 세월을 버텨올 수 있었던 까닭은 이발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모두 달동네에 살았기 때문이다. 청송이발소는 해방되고 피난민들과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달동네 와우산 마을에 있다. 세상의 주류에서 밀려난 사람들과 함께 40년의 세월을 견뎌오다 보니 변할 것도 달라질 것도 없었다. 마을 자체가 시간을 30여 년 전쯤으로 후퇴시켜 놓은 듯한 풍경이다.
“여그가 해방된 뒤부터 지금까지 광주에서 유명한 달동네여. 이발관 한 번 둘러보문 알겄지만 첨 만들 때랑 달라진 게 별로 없을 것이여. 요새 어떤 이발소에 저런 거울하고 세면대가 있을 것이여.”
건물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찾아드는 사람은 옛날과 천지차이다. 나이 지긋한 단골 어른들만 가끔씩 얼굴을 비칠 뿐 젊은 층은 일절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한때는 가장 많이 찾았던 까까마리 초·중·고 학생들도 이제는 거의 없다. 다만 생활형편이 어려워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어린애들이 노인들의 손에 이끌려 가끔씩 찾아올 뿐이다. 때문에 키높이 합판 의자는 거의 사용할 겨를조차 없다.
“요새는 젊은들이 전부 미장원 다니지 이발소에는 안 와. 근께 주말에만 쪼까 사람이 있고 평일에는 손님 많이 만나문 서넛이제. 어디 여그만 그러겄어. 요즘은 뭐 광주 바닥에 있는 모든 이발소가 다 그렇지.”
청송이발관은 이발을 해온 시간만 오래된 것이 아니라 요금도 옛날식이다. 아이들 까까머리는 3000원, 어른도 6000원이 전부다. 손님이 전부 동네 사람들이고, 연세도 지긋하기 때문에 많이 받기 무엇하다는 게 이유다.
“나는 여기 와서 이발한 지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아. 그래도 항상 찾아온 사람들 얼굴이 같은께 모도 친하게 지내제. 와우산도 인제 큰길도 나고 발전도 시킬 모양인디 언제까지 내가 여그 있을 지는 모르겄지만 하여튼 요 이발소가 오래 남아 있었으면 싶어. 이만한 세월이 흔한 게 아니잖어.”
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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