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동 `한일미싱’

양복점과 양장점, 미싱사…. 70년대 광주 시내 상권을 주름잡던 업종이다. 현재까지도 양복점과 양장점에는 번화의 흔적이 다소 남아 있다. 그러나 `미싱(재봉틀)’은 취급하는 가게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 한때 수입산 미싱 한 대 값이 논 서너 마지기를 웃돌고, 그것이 결혼 필수품이었다는 말만 전해질 뿐이다.
학동에서 34년의 시간을 견뎌온 한일미싱. 채 세 평을 넘기지 못하는 가게에 많은 재봉틀들이 진열돼 있다. 새것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고 모두 오래된 세월이 붙어 언뜻 봐서는 판매점이라기보다 골동품 가게를 연상시킨다. 가게 주인 장춘원(63)씨는 그 오래된 물건들을 보듬고 평생을 살았다.
“미싱만 만지다가 요 가게랑 같이 늙어부렀제. 스무 살도 못됐을 때부텀 미싱가게 점원으로 일하다가 요 가게 장만하고 요날 평생 미싱만 고치고 산께. 요새는 미싱이 나오도 안항께 아무리 못되야도 20년씩은 된 물건들이제.”
한일미싱에서는 40~50년 정도 묵은 재봉틀은 오래된 축에도 끼지 못한다. 70~80년은 기본이고 세상에 나온 지 100년이 넘은 재봉틀도 여러 대가 놓여져 있다. 가격도 오래된 것일수록 높다. 골동품이라서가 아니라 실제로 기능 면에서도 110년 된 미국산 재봉틀이 가장 뛰어나다. 일반 중고 재봉틀 한 대 값은 7만원 정도가 고작이지만 이것은 30만원을 넘어간다. 다만 재봉틀을 쓰는 가정집이 거의 없다보니 잘 팔면 한 달에 미싱 한 대 정도 판매하는 것이 고작이다.
“80년대에 만들어진 것들은 금방 고장나. 옛날 것이 짱짱하고 오래 쓰제. 지금은 쌀 두 가마니 가격도 안 나가지만 옛날에는 저 놈 가격이 웬만한 집 한 채 수준이었제. 동네에서 최고 부자 소리 듣는 집에나 한 대 있을까 말까 했응께.”
70년대는 중고 재봉틀이 없어서 못 파는 정도였고, 80년대에도 그나마 목구멍 보존은 해주던 가게는 기성복의 등장과 함께 빠른 속도로 세상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지금은 하루 종일 1000원짜리 한 장 벌기도 힘들다. 요즘은 판매는 거의 없고 수리 의뢰가 고작인데 그것도 일주일에 한 대 정도가 전부다. 수리비도 기껏해야 만원을 넘지 않는다.
한일미싱에서는 재봉틀뿐만 아니라 지금은 이름조차 생소해진 석유곤로도 취급한다. 80년대까지 곤로는 일반 가정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었다. 많이 팔릴 때는 하루 30여 대가 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현재도 곤로를 찾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는 하다. 다만 그 용도가 다르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겨울에 의자 밑에 놓고 난방을 할 요량으로 사 간다.
미싱이건 곤로건 현재는 생산해내는 업체가 아예 없다 보니 수리하는 방법도 독특하다. 중고제품 하나를 완전하게 분해해 고장난 여러 개의 재봉틀과 곤로를 고치는 방식이다.
“이것저것 가져다 맞춰서 땜빵하는 게 내 일이제. 근디 살라고 오는 사람도 고치러 오는 사람도 거의 없어. 내 좋은 맛에 여지껏 이라고 있는 것이제. 요번 일주일 내내 100원짜리 한 닙도 구경 못했네.”
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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