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를 대표하는 역사인물로 김덕령 장군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시호 ‘충장(忠壯)’은 광주 곳곳에 남겨져 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거리 이름부터 향토사단, 학교, 서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2003년부터는 해마다 10월이면 ‘충장로 축제’가 열린다. 물론 이 거리의 상권 활성화가 주목적이다. 장군의 이름이 구도심의 해체로 인한 공백을 메워줄 기재가 되었으니…. 그저 7080 추억에 젖어 가을 한때를 즐기기만 해서는 도리가 아니리라. 다시금 그의 생애와 유지를 되새겨봄 직하다.
얼마 전 북구청 공무원 김영헌씨가 맞춤한 책을 펴냈다. 《임진왜란 최후의 의병장 김덕령 평전》이다. 고서를 뒤지고 발품을 팔아 건져 올린 장군의 일대기가 자못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평전을 덮는 순간 슬픔과 설움이 밀려온다. 스물 아홉의 나이로 억울하게 옥사한 장군의 비극적인 삶 때문이기도 하다. 장군은 전쟁중에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다. 왜적을 코앞에 두고 무고한 장수를 장살하다니. 과연 무능한 임금, 모함과 질시로 날을 샌 당쟁의 결정판이다. 장군의 비극적 최후는 조선군의 치명적인 전력 약화를 가져온다.
“장군이 죽은 뒤로부터는 모든 장수들이 저마다 자신을 보전하지 못할까 의심하였다. 곽재우는 군사를 해산시켜 버리고 벽곡(곡식을 안 먹고 신선이 된다는 뜻)하여 화를 피하였고, 이순신은 싸움에서 투구를 벗고서 스스로 탄환을 맞아 죽으니….”
저자가 옮긴 이민서의 《김장군전》 기록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자살설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아무튼 김덕령 장군 사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호남은 왜적들에게 철저히 유린된다. 만약 호남으로 향하는 길목, 진주성을 지키던 장군이 있었더라면…. 당시 백성들의 안타까움에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우리가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공부했던 권율 장군이나 유학자 유성룡은 어떤 입장이었을까. 그들 역시 충장공의 누명을 벗겨주기는커녕 옥사를 방조하거나 부추겼다한다. 대체 출신이 무엇이고 당파란 무엇이더란 말인가. 진실과 정의에 눈과 귀를 막아버린 암투의 역사에 기가 막힐 뿐이다.
정파의 이해에 골몰해온 역사는 반복되는가. ‘빨갱이’라 죽이고, ‘반동’이라 죽여온 참혹한 현대사도 다를 바 없다. 국가나 민족의 안위나 미래는 결국 허울에 불과한 게다. 지역으로 갈리고, 정당으로 찢어진 오늘날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리고 지금, 북핵 문제를 두고 패싸움이 질기고도 거세다. 모두가 위기라고 설레발이지만 내놓는 해법에는 얄팍한 정치적 속셈을 깔고 있다. 저마다 대권의 향배와 정계개편에만 촉수를 들이대고 있다. 가히 왜적의 칼끝이 목에 닿을 때까지 네 편 내 편으로 갈려 벼슬만 탐하는 꼴이다. 하필 정권마저 굳은 심지나 철학이 없는지 오락가락이다. 불쌍한 백성들만 갈피를 잡지 못해 불안에 떨고 있다.
《김덕령 평전》은 국가적 불행이란 개인이나 패거리의 사욕에서 비롯되었음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과오는 결국 후대에 의해 낱낱이 밝혀져 심판 받는다는 것도. 무능한 임금으로 낙인 찍힌 선조처럼 봉건왕조의 군주도 예외는 아니다. 설사 우국충정으로 가장해 당대를 속일지라도 말이다. 더 큰 권력에 허기져 정치공세만 일삼는 무리들은 후대에 물려질 제 이름을 걱정해볼 일이다.
김영헌씨의 《김덕령 평전》은 충장공의 신원(伸寃)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황풍년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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