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명옥헌

▲ 명옥헌의 겨울, 엷은 얼음의 빛이 창백하다.



 꽃의 시간이 백일을 간다고 했다. 그리하여 목백일홍이다. 지금은 꽃의 계절이 아니다. 스산한 겨울의 바람이 원림을 지나간다. 꽃 피는 때에만 그곳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다. 피어난 목백일홍의 꽃잎이 하늘을 덮고 나중에는 연못을 덮는 풍경은 장관이다. 이 겨울 그곳은 고적하다. 담양 명옥헌이다.

 차가운 이 쓸쓸함이 어쩌면 원림과 연못, 정자로 이루어진 명옥헌의 진면목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연을 곁에 둔 옛 선비들의 모습은 아름답고 고적했다. 연못은 그들이 낮은 자리에서 꿈꾸던 하늘을 담고 있다. 아름다운 정원이다.

 창백한 명옥헌을 걸으며 마르시아스 심의 소설 《명옥헌》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어둠 속에 의연히 선 명옥헌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품어 안는 일이고, 새로운 것은 언제나 헌 것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살을 깨달았다.”>

 사나흘 날이 추웠다. 명옥헌의 네모난 연못은 엷은 얼음을 깔고 있다. 가만히 보면 보인다. 저 쓸쓸하고 외롭고 고적한 풍경 속에서 새로운 힘이 나온다. 그것의 실체는 옛 것들이 들어올리는 시간의 깊이다. 겨울이 있고 난 다음에야 봄이 오고 명옥헌의 목백일홍들도 분홍 꽃잎을 피어낸다. 명옥헌이 견딘 시간으로 매일 새로움이 피어났다. 새 것은 헌 것의 아름다운 자식들이다.

 명옥헌을 만든 사람은 오명중이다. 그의 아버지 명곡 오희도의 선비정신을 담기 위해 정자를 지었다. 이름도 셋이다. 명옥헌 외에도 장계정과 도장정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장계(藏溪)는 정자를 만든 오명중의 호이다. 도장정은 저 옛날 명옥헌 뒤에 도장사라는 사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정자의 입장에서 보면 주와 부가 바뀌었다. 지금의 사람들은 건물보다 나무의 숨결에 훨씬 마음을 준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됐는데 기념의 주체는 정자가 아니다. 명옥헌의 원림들이다. 사방에 물이 흐르고 맑은 물 떨어지는 소리가 구슬처럼 흐른다. 그래서 명옥(鳴玉)이다.

 명옥헌은 문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시인 황지우는 한때 세상을 돌아서 나와 명옥헌의 원림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땅의 모양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을 잠시나마 자기 안의 연못으로 담았다. 배롱나무들에 대한 생각을 담아 몇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 시, 아득하다.

 <목욕탕에서 옷 벗을 때/ 더 벗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나는 나에게서 느낀다/ 이것 아닌 다른 생으로 몸 바꾸는/ 환생을 꿈꾸는 오래된 배롱나무> (황지우 `나의 연못, 나의 요양원’ 중)

 배롱나무는 목백일홍의 다른 말이다. 누구나 이미 벗었지만 더 벗고 싶은 것들이 있다. 백일을 피우고도 또 피우고 싶은 꽃이 있다. 시인은 돌아 나와 세상 밖에 시간을 누르고 앉아있지만 내면엔 할 말이 많았다. 연못 주위를 가득 채운 목백일홍은 많은 질문을 건넨다. 그 말들이, 그 나무가 명옥헌의 오래된 생각이다.

  글=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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