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진시영

 ‘관리감독자’라고 적힌 안전모. 손을 흔들지 않았으면 지나칠 뻔했다. 공사현장, 안전모를 쓴 ‘작가’라니.

 영상 작업을 주로 하는 진시영 작가를 대전의 건물 신축 공사장에서 만났다.

 “제가 하고 있는 작업입니다.”

 공사장 소음 속에서 작가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은 대덕연구단지의 주요 건물인 대덕 비즈니스 허브센터 외벽. ㄷ자 형태의 LED 전광판 속으로 LED 조명들이 흐르고 있다.

 “내일 영상이 뿌려지면 완성된 형태를 볼 수 있을 겁니다. ㄷ자 형태의 전광판 안에 들어가게 되는 거지요. 이 건물은 일반 시민들이 자주 왕래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을 주제로 한 영상과 애니메이션이 주로 들어가게 될거예요. 전광판은 폭이 80cm, 길이가 65m인데 그 안에 영상을 넣기가 상당히 어려습니다.”

 작업이 진행되는 곳이 작업실이라면, 작가의 작업실은 실내가 아닌 실외인 셈. 스케일이 크다. 그러고 보니 보통 작가의 작업실에서 이뤄졌던 다른 인터뷰와 달리 이번 인터뷰는 2개의 도 경계를 넘었다.

 급격히 쌀쌀해진 날씨 때문에 근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숍 유리창에서 내다보니 허브센터 건물 LED전광판이 보인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작가가 하고 있는 작업이 그렇다. LED를 이용한 미디어 파사드. 건물 외벽을 대형 스크린처럼 꾸미는 것. 미디어 파사드의 뜻이다.

 밖으로 밖으로…사각 프레임도 깨고 작업실에서 나오고

 “제가 하는 작업 특성 상 전국을 돌아다녀요. 머리 속의 생각을 실제로 구현할 업체들을 찾으러 다니기도 하고, 이곳 저곳에서 하고 있는 작업들도 있고, 성신여대·충북대·전남대에 출강을 하고 있기도 해서요. 광주에 적을 두고 여기 저기 왔다 갔다 하는 거죠.”

 잠을 거의 못잤다는 작가는 에스프레소 두 잔을 ‘복용’하듯 마셨다. 전날(정확히는 ‘오늘’ 새벽)에는 경기도 미술관 창작센터에 있다가 광주를 찍고 대전으로 왔다는 작가는 24시간 동안 3개 도시를 이동한 셈.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영상작업을 통해서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고 했다. 그가 전국을 이동하는 것도 그와 관련이 있다.

 “저는 원래 영상 공부를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작업을 하면서 답답하더라구요. 스크린, 모니터… 모든 것이 사각이고 전시를 해도 항상 실내에서 그것도 어둠컴컴한 데서 해야 하고, 자꾸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게 되니까요.”

 그래서 깼다. 사각의 프레임도 깼다.

 “영상으로도 ‘사각’의 프레임을 깰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죠. 예컨대 ‘사과’를 영상으로 표현하다고 하면 사과 모양에 영상을 넣을 수도 있잖아요.”

 LED라는 소재는 그것을 구현하는데 적합했다. LED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다. 작가는 LED의 가능성을 발견하고는 본격적인 작업을 위해 1년 동안 전국을 돌며 사전 조사를 했다. 전국의 LED업자들을 만나러 다녔다.

 지난 여름, 광주신세계갤러리에서 있었던 그의 개인전에선 파도처럼 구불거리는 LED디스플레이에서 파도치는 바다의 영상을 볼 수 있었다.

 미디어 파사드와 LED는 ‘밖으로’ 나오는 계기를 줬다. 최근 서울 강남구의 거리에 설치된 ‘미디어 폴(LED와 LCD를 이용한 높이 11m의 막대형 구조물)’에는 그의 영상 작품인 ‘linking spot’이 흐르고 있다. 광주 서구 풍암저수지에는 그가 LED를 이용해 제작한 조형물이 설치되고 있다. 상징물 안에 이미지가 떠다닐 수 있도록 제작했다. 지난 여름 금남로 한켠에는 LED를 이용해 만든 컨테이너 박스가 세워져 시민들과 만나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컨테이너 안에 들어가 낙서를 하기도 하면서 온몸으로 LED 빛을 체험했다.

 그러고 보니 작가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도 LED. 왜 LED인지 뒤늦은 질문을 던졌다.

 “LED가 쓰이다보니 영상작품이 사회속으로 들어갈 수 있더라구요. 옥션이나 페어에서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한 가운데로 들어가잖아요. LED는 전기가 별로 안들고 빛의 강도도 세다는 장점도 있어요.”










 ▲대전광역시 대덕 비즈니스 허브센터에 설치된 미디어 파사드










 ▲대전광역시 대덕 비즈니스 허브센터에 설치된 미디어 투시도

 

 예술? 산업? 경계 오가기?

 다만 “본업은 예술가인데 자꾸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 상황이 스트레스”라는 푸념이 따라 붙는다. 역시 스케일에 따른 문제다. 건물의 소유자, 건축업자, 때론 관공서 등등 많은 사람들이 얽혀있다. 또 미디어 파사드 같은 작업들은 한 명이 할 수 없다.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과 이를 구현하는 사람들이 함께 협업을 하는 시스템입니다. 작가와 기술자가 짝을 이뤄 분업을 해야하구요. 대부분 작가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지만 저 같은 경우는 혼자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죠. 설치하는 사람,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 등등 모두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 갑니다. 그래서 저도 성격을 바꾸려고 애를 써요.”

 제작비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에 ‘돈’ 문제가 결부되고 건축주의 뜻이 있어야 한다는 한계도 있다. 상업적 성격이 침투해 들어올 확률도 커진다. 간섭이 많다는 뜻도 되겠다.

 강남구에 설치된 미디어폴도 비슷한 예가 될 수 있겠다. 미디어 폴은 애초 상업 광고로 채워졌다. 여론이 좋지 않자 예술작품 30%, 공익적인 정보 제공 20%, 나머지 50%를 상업 광고로 채웠다. 가능성과 한계는 공존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풍경을 상상한다. 예컨대 떠밀리듯 도심의 거리를 지나갈 때 눈을 들어 마주친 풍경이 말을 건다면?

 “지쳐있다가 놓친 감성들을 찾아서 던져놓는 것.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겠죠.”

 다양한 종류의 간섭을 뚫고 원하는 것을 던져놓은 것 역시 작가의 몫이겠다.

 “진짜 하고 싶은 작업은 관객과 서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미디어영상 작품이에요. 일방적인 원(one) 채널이 아니라 관객의 반응이 작품에 포함되는 거죠. 도심을 캔버스 삼아 그러한 작업을 하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입니다.”

 작가의 말에 자신감이 흘러나왔다.










 ▲지난 여름 광주 금남로에 세워졌던 컨테이너박스의 투시도.

 

 열정 그리고 의욕

 작가에게 개인적으로 아픈 기억이 있음을 안다. 의욕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작가의 모습 뒤에 보이지 않는 ‘담금질’의 과정을 짐작해보는 이유다. 1984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가족들을 잃었다. 작가의 부친은 지역 화단에 적지 않은 흔적을 남긴 고 진양옥 화백. 당시 사고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그림 그리는 걸 싫어했어요. 그런데 혼자 있으니까…. 2층은 아버지 화실이고 주위가 다 그림이었는데요. 어느날 미술학원을 지나가다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친이 초대 학장을 지냈던 조선대학교 미술대학에 들어갔다. 시작은 서양화였다. 학부 때는 서양화를 공부했다. 그러다 뉴욕으로 건너가 영상쪽을 공부했다. 뉴욕행의 계기가 된 것은 광주비엔날레였다.

 “비엔날레가 뭔지도 몰랐던 때였는데 조교수님이 광주비엔날레에 가보라고 하시더군요. 충격이 컸어요. 그림은 없고 생전 처음보는 영상과 설치물들이 가득했어요. 이런 게 현대미술이구나 처음 알았죠. 새로운 형태의 현대 미술을 배워보고 싶었습니다.”

 새로운 것에 끌렸던 그는 유학을 결심했다. 뉴욕의 프랫대학원에서 조건부 입학허가를 받았다. 차분히 처음부터 공부를 하고 싶었다는 작가는 1학점씩만 수강하면서 학기를 늘렸다. 건축·음악·무용·퍼포먼스·조각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유학시절 죽기 살기로 공부했어요.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으로 공부하는 거니까 허투루 할 수 없었어요.”

 ‘죽기 살기’의 열정은 계속 됐다. 거대한 순환의 순간을 영상으로 담고 싶었던 그는 대학원 시절 카메라를 들쳐매고 캐나다로 날아가 어느 바닷가 해안에서 6시간 동안 분단위로 셔터를 눌러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과정을 담았다. ‘죽기 살기’의 열정은 이어졌다.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로 있었던 그는 심사 면접날 “무조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다소 예술가스럽지(?) 않은 멘트로 주위를 놀래키기도 했다.

 적극적이고 의욕적인 작가는 결과 남들처럼 정주의 삶을 이어갈 수가 없다.

 “가족과 함께 오붓한 주말”을 부러워하는 작가는 그런 이유로 아직 싱글이다. “도시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작가는 인터뷰를 끝내고 또 한잔의 커피를 챙겨 들었다. 다시 광주로 달려가야 할 일이 생겼다. 아버지의 유작들을 재조명하기 위한 작업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대인예술시장프로젝트와 함께 영상 작업을 논의하기 하기 위해서 기획자도 만나야 한다. ‘죽기 살기’의 열정은 계속 이어질 기세다.

 글=황해윤 기자 nabi@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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