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떠오른 이름이 있다. 윤민자.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가 일깨워준 존재감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와 `우리’는 친구가 됐다.

 그를 기억하는 광주 사람들 누구인들 `우리’ 아니겠는가? 미국에 있는 그와 광주에 있는 `우리’ 간 소통의 끈이 연결된 것이다.

 윤 씨가 광주를 떠난 건 숙명처럼 짊어진 굴레 때문. 그 이름이 대표하는 건 광주의 아픔, 오롯한 속살 그대로다. 인화학교, 청각장애, 성폭력, 대책위원회, 그리고 이민.

 2000년대 초반 민주도시 광주가 불의의 `도가니’로 묘사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 일어났다. 청각장애 특수학교인 인화학교에서 장애학생들이 수년간 교장과 교직원에게 성폭행을 당해온 게 밝혀진 것.

 곧바로 `광주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윤 씨는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투쟁에 앞장섰다. 법원은 1심에서 관련자에게 중형을 선고했지만, 2심에선 판결이 뒤집혔다. `죄를 뉘우치고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윤 씨가 광주를 떠난 게 그 무렵이다. 2009년 가을, 그는 이민 길에 올랐다. 미국 알버쿼키라는 도시였다. 지난해 `전라도닷컴’ 기고에서 그는 `빛과 바람의 도시’,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 두메산골쯤 된다’고 표현했다.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소식이 날아왔다. “모두 잘 지내시지요?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는 짧은 한마디와 함께.

 그런데 요즘은 페이스북에도 그의 글이 뜸하다. 근황을 알기 어렵다. “민자 언니! 요새 어찌 사우? 글도 없고 보고잡굼마. 언니가 사준 화분은 잘 크고 내 키만 해져붓네….”

 어떤 이의 글인데, `광주’의 마음이 다 이같으리라.

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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