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처럼 굳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우정

 지금의 옛 도청 옆구리를 끼고 돌면 광주은행 옆(으로 기억되는) ‘일구음악학원’이 있었다. 이제는 동네 악사가 아닌 진짜 음악공부를 해보려고 드럼부에 등록을 했다. 드럼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 시절 배호라는 가수가 악단의 드럼주자였고 꽤나 인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드럼을 배우기로 했지만 정작 내 생각은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훗날 악단을 꾸리면 상훈이가 기타를 맡고 내가 드럼을 맡으면 중복도 피하고 악단에서 서로가 필요한 파트를 맡게 되어 상호작용을 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는 원장님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아주 열심히 고무판을 두드렸다. 한 6개월 지났을까. 제법 그 당시 유행했던 트위스트나 맘보 차차차 스윙 등 리듬을 연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래? 큰 꿈을 꾸려면 서울로 가자. 드디어 서울 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른바 청운의 푸른 꿈을 꾸고 결행한 상경이었다.

 그 때 상훈이는 이미 미아리 외삼촌이 운영하는 화장품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상훈이가 전부였던 지라 물어물어 그가 사는 동네를 찾아갔다. 미아리 시장에서 열심히 물건을 팔고 있는 상훈이는 수돗물, 이른바 서울물을 먹어서인지 얼굴이 보름달 같았다. 점방이 다 훤했다.

 나는 그 곳에서 친구와 헤어져 지금은 흔적도 없어져 버린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 뒤편 비가 오면 줄줄 새는 루핑 집에 쪽방을 얻었다. 강둑 양쪽으로 죽 늘어선 무허가 둑방 촌은 청량리까지 이어졌다. 대부분 호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둑방에서 내가 다니던 왕십리 중앙시장 근처에 있는 ‘동양 음악학원’까지는 꽤나 멀었다. 그때 드럼을 가르쳤던 복길이는 실력이 대단했다. 그의 연주는 한 마디로 눈이 휘둥래질 정도였다. 시골에서 꽤나 한다고 자위했던 나는 속으로 ‘땍기. 그런 실력으로 어디서 드럼친다고 할래?’ 자책하며 부끄러웠다.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에….

 8군에서 퍼스트 기타로 활동했던 정섭이는 복길이와 날마다 생전 듣지도 못한 ‘더 아치스’의 ‘필링 소 굿’, 비비 킹의 ‘스텐 바이 미’, 지미 헨드릭스, 레드 제프린 그리고 컨추리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자유자재로 연주했다. 그런데 이런 대가들과 음악 한번 해봤으면 했던 꿈은 의외로 쉽게 이뤄졌다. 관심을 보이던 나에게 정섭이가 그룹사운드를 결성하려는데 세컨 기타와 오르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한번 부딪혀 보는 거야. “실력은 없지만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말을 하자 “정섭이는 악기 값이 비싼데 사 올 수 있느냐 ?” 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사올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해보라는 정섭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골집에 내려와 아버지를 볶았다. “하라는 공부는 안 허고 뭔 짓이냐”고 말씀은 하시면서도 재산 목록 1호인 소를 팔아다 내 소원을 들어 주셨다. 이른바 소 한 마리 값의 오르간을 사들고 그들 앞에 나타났다.

 드디어 퍼스트 기타에 정섭, 세컨에 상훈, 베이스 병훈, 드럼에 복길이, 오르간에 나,이렇게 5인조 그룹사운드 ‘싸베지’가 결성됐다. 졸지에 오르간을 맡은 나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밤을 세워가며 연습을 했다. 나는 상훈이가 잘 하는 줄 알았는데 그들 앞에서는 병아리였다. ‘인아 가다 다비다’라는 대곡을 연습하는데 당당 디다다당 읏다 읏다 하는 엇박자를 치지 못해 리더였던 정섭이에게 혼줄이 나곤했다.

 긴급조치 7호를 발령한 박정희 유신독재가 기승을 부려 국민들은 숨도 쉬지 못한 살벌한 시절. 돈이 없어 라면 하나에 값이 싼 국수를 끓여먹으며 연명하던 우리 그룹이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미8군 무대에 설 수 있는 오디션에 합격했다. 계약금 받아 단체 유니폼도 마치고 오랜만에 고기도 배불리 먹었다.

 민판기 <(사)금계고전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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