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내부에 싸움의 전선을 형성하라!”

 홍세화(65), 그는 숨을 쉬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국가의 공공성에 대해 고민한다. 프랑스에 있을 때도 고국에 돌아온 다음에도 그는 늘 낯선 타인이었고, 공공성에 대한 내적 질문을 계속했다. 시간이 갈수록 질문 안으로 현실인식이 더해져, 질문은 외연을 확장했다. 돈 앞에서 그 어떤 것도 무력해지는 시절이다.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경쟁만이 있을 뿐이다. 자본이 권력의 정점에 서고, 공공의 것인 국가를 사적 이익의 대변자인 기업 ‘CEO’ 출신에게 맡기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도 있을 것이고, 원인을 알면 치유도 가능할 것이다. 기형적으로 물질에 맹신하는 풍토는 어디서 갑자기 생겨난 것일까? 그는 대한민국에 만연된 이 ‘사회적 질병’의 원인을 ‘불안’에서 찾는다. 복지가 없는 나라다. 믿을 게 스스로의 능력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 누구도 지쳐 엎드린 사람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내가 몰락하면 가족이 몰락할 수밖에 없다. 외환위기는 불안을 트라우마로 만들었다. 스멀스멀 몸을 기어오르는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이 나라에서는 ‘돈’이었다. 남은 없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사회적 질병’을 만들어낸 세력은 누구일까?

 

 파리 사람들의 활력… 슬픈 ‘문화충격’

 홍세화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척도는 프랑스다. 그는 왜 거기서 오랜 망명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대학에서 그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자고 일어나니 그는 어제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1966년 그는 서울공대에 입학한다. 한 학기 만에 그만뒀다. 국가가 불온한 세력들로 지목한 선배들을 만났고,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힌 책들을 보며 그는 눈을 떴다. 일종의 ‘개안’이었다. 학교를 다닐 이유가 사라졌다.

 3년의 방황 뒤 그는 다시 서울대에 입학한다. 이번에는 외교학과였다. 다른 나라에서 우리 안의 길 찾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의 학교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삼선개헌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낭독했다가 남산에 끌려갔고, 학교에서는 제적됐다. 어렵게 복학은 됐지만 졸업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입학하고 졸업까지 무려 11년6개월이 걸렸다. 그 무렵 그는 조국의 민주화와 민족해방을 위해 조직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가입했다.

 조그만 무역회사에 취직도 했다. 1979년 3월 그는 프랑스로 떠난다. 해외 파견근무였다. 그렇게 떠난 그가 한국 땅을 다시 밟은 때는 1999년 6월이었다. 20년 3개월만이었다. 프랑스로 갔던 그 해 여름 ‘남민전사건’이 터졌다. 그는 프랑스 정부에 망명을 요청했다. 정치적 탄압이 망명 이유였다.

 “프랑스 땅을 처음 밟았을 때부터 슬픈 문화충격을 느꼈다. 서울은 암울하고 공기가 무거운데, 파리는 뭔지 모르게 공기가 가벼웠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고, 몸에서는 삶의 활력 같은 게 느껴졌다. 그때 알았다. 내가 무언가에 짓눌려 살았다는 것을. 문화충격은 망명 신청 때도 계속됐다. 남민전에서 무얼 했냐고 묻는데, 정권을 비판하는 삐라 뿌린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었다. 사실대로 말했더니 돌아오는 답이 ‘그 게 뭐 어때서, 당연히 할 수 있는 거 아니냐?’였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어쩔 수 없이 그는 파리에 정착했다. 먹고는 살아야 했으니 직업을 가져야 했다. 처음엔 관광 안내를 하다가 택시운전을 시작했다. 프랑스는 그 땅에 살고 있는 누구에게나 노동권을 부여한다. 벌이는 한 달에 1만2000프랑, 우리 돈으로 250만 원 정도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다. 프랑스의 보편 복지는 치밀했고, 무엇보다 교육비가 들지 않았다.

 그는 늘 공부했다.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갈 것이고, 그 때를 위해 긴장을 유지했다. 많은 책들을 읽었고, 고국의 상황에도 늘 눈과 귀를 열어놓고 있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은 80년 오월 광주였다. 이 나라에서는 철저히 고립됐던 광주를 프랑스의 방송들은 일주일 동안 톱뉴스로 배정했다.

 “당시 뉴스 진행자가 이런 말을 했다. ‘광주 사람들이 소수민족인가?’ 민족문제나 종교문제가 아니면 이런 학살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견해였다. 멀리서 신군부의 태도에 정말로 분노했다. 대한민국의 현실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였다. 원래 숲은 멀리서 보면 더 잘 보인다. 정의가 무너지는 사회 그것이 대한민국의 진짜 현실이었다.”

 읽고 공부하고 틈틈이 기록도 했다. 택시기사였으니 파리의 택시제도에 대해 기록했다. 그 사이 고국에서도 민주화의 바람이 불었다. 별 기대 없이 책도 한 권 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다. 근데 폭발적 반응이 왔다. 순식간에 3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어느 순간 그는 유명한 사람이 됐고, 그가 제시한 ‘똘레랑스’는 이 나라에서 홍세화와 동의어가 됐다. 그가 생각하는 ‘똘레랑스’는 과연 무엇일까?

 “단순히 관용을 베푸는 게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같음을 발견하는 게 똘레랑스다. 그것이 사상이건 종교이건 나와 다르다고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정의가 아니다. 세상이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데 자기 입장에서 침묵하는 것 또한 정의가 아니다. 한국사회는 같이 살자가 아닌 나만 살면 되는 경쟁의 사회다. 똘레랑스의 가치 실현은 아주 요원하다.”

 

 “교육은 생각하는 존재를 키우는 일”

 2002년 그는 영구 귀국했다. 한국사회의 변화를 짐작은 했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돈으로 귀결되는 극단의 신자유주의가 만연돼 있었다. 국가는 공공성의 그릇 역할을 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예측했다. 멀지 않아 국가가 기업이 되고, 대통령은 기업의 총수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자본이 제왕의 자리에 군림하면 반드시 국가 국력은 소수의 이익집단이 된다.

 반성이 없는 한국사회, 과연 답은 없는 것일까? 그는 어긋난 사회의 개혁을 교육에서 찾는다. 그는 프랑스의 사회를 봤고, 교육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목도했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다. 그런데 학교 사회 과목은 가장 중요하게 배워야 할 자본주의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아는 게 없으니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가능하지 않다. 20년 망명 생활을 했던 프랑스는 초등학교 때 이미 노동조합을 방문하고, 중학생이 되면 모의로 노사협상을 진행한다. 그런 차이가 알고 있는 수준을 반영한다. 무지가 대한민국을 정의가 몰락한 사회로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사람을 생각하는 존재로 키우지 않는다. 암기를 잘 하면 최고다. 심지어 긴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사회와 역사 과목도 암기 능력으로 평가받는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해가 중요할 뿐 그것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배경은 가르치지 않는다. 엽기적인 교육이다.

 지금 길을 찾지 못하면 표류가 길어질 것이다. 그는 말했다. “교육이 아이들을 체제에 순응하는 조교로 키운다. 생각을 키워야 하는 아이들에게 너는 생각하지 말고 그냥 외우라고 닦달한다. 교육 과정에서 권력의 의도대로 길들여진 아이들의 나중은 전부 똑같다. 다른 방법이 없다. 교육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국민이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 싸움의 전선을 각자의 내부에 형성했을 때 길은 열린다.”

글=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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