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라고 빼고, 살아 돌아왔다고 빼고

▲ 홋카이도 토목공사장에서 학대를 당한 한국 피해자들. 도망을 기도하거나 반항을 하면 심한 폭행을 당해야 했다.

 유홍계 씨 “혈육은 나 하나밖에 없는데”

 “호적만 들춰봐도 금방 알 것 아닌가. 손이 귀한 집이어서 혈육이라고는 유일하게 나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는데….”

 유홍계(64 전남 광양시) 씨는 작은 아버지의 억울한 한을 생각하면 분하기 짝이 없다. 작은 아버지 유우근 씨는 해군 군속으로 끌려가 1943년 1월 오스트레일리아의 북쪽 서태평양에 있는 섬 뉴기니에서 사망했다.

 집안은 대대로 손이 귀했다. 조부 대에 이르러 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등 삼형제가 있었는데, 작은 아버지는 총각 때 전쟁터에서 돌아가시는 통에 아예 손을 두지 못했고, 고모님마저 여순사건에 희생돼 돌아가시고 말았다.

 “일가친척이라곤 한 명도 없어요. 총각 때 끌려가 죽은 작은 아버지에게 처자식이 있을 리 없고, 저도 남동생이 있었지만 결혼도 않고 일찍 죽는 바람에 집안을 통틀어 봐야 유일한 혈육이라고는 저 하나밖에 없어요.”

 정부는 1975년 일제 징용 사망자에 대해 보상한다며 30만 원을 지급했다. 그러나 부모나, 처 친자만을 대상으로 해 한 푼 받지 못했다. 현행 `강제동원 피해 지원법’에서는 형제까지 지원금 수령 범위에 포함됐지만, 이것 또한 유 씨에겐 남의 일인 셈이다. 유일한 형제였던 아버님마저 사망하고, 조카는 상속권이 없다며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 씨는 정부기록보존서 등을 통해 작은 아버지의 임금 등이 아직 일본 정부에 공탁돼 있는 걸 알게 됐다. 정부는 일본에서 못 받은 미수금에 대해 당시 1엔당 2000원을 산정, 지원금 형태로 지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유씨는 이 돈마저 수령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 조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 돈에 욕심 있어서가 아닙니다. 목숨 바쳐서 번 돈은 개인 재산이 아닙니까? 보상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개인 개산은 개인한테 돌려줘야 할 것 아닙니까? 사돈네 8촌까지라도 뒤져 그 돈을 찾아줘야 마땅할 정부가 조카라는 이유로 배제하고 개인 재산을 가져가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도둑놈이지 정부입니까?”

 작은 아버지의 억울한 한을 풀겠다며 백방으로 나서던 아버님마저 돌아가시고, 작은 아버지 제사를 대신 모시고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남아있지 않다.

 “저는 삼촌도 없고 일가친척도 없는 사람입니다. 손이나 많은 집이라면 모를까 집안을 통틀어 저 하나 남았습니다. 호적만 들춰봐도 다 알 것인데 단지 조카라서 못 주겠다니요….”

 일본에 못 받은 미수금이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지만, 단지 조카라서 지급할 수 없다는 한국정부의 입장. 과연 유씨의 주장이 과한 것일까. 그러면 일본에 남아있는 그 돈은 과연 누구의 돈인가?

 

 정광조 씨 “살아 돌아 온 것도 죄?”

 정광조(66 여수시 신기동) 씨는 아버지 얼굴을 모른다. 태어나기 1주일여 전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말았기 때문이다. 1946년 12월쯤이었다.

 가족에 의하면 아버지 정영운 씨(1946년 사망)는 1943년 5월쯤 핏덩어리 딸을 남겨두고 징용에 끌려갔다. 사가현의 어느 탄광이었다. 탄광에서의 생활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밥도 제대로 주지 않는 상태에서 걸핏하면 매질이었다.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왔으나 이미 제 몸이 아니었다. 갱도가 무너지는 탄광사고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지만 크게 몸을 다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귀국길에 옆에 오는 사람들이 들것에 서 너 사람이 떼밀고 왔다고 해요. 그 뒤로 하반신을 아예 쓰지 못하고, 약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드러눕다 불과 1년 만에 돌아가셨다고 해요”

 정광조 씨는 “산송장이나 다름없이 왔는데, 우리가 다른 유족들과 다르게 뭐가 있느냐”며 “단지 살아 돌아 왔다는 이유로 정부가 나 몰라라 하는 게 맞느냐”고 말한다.

 정 씨는 “이런 식이면 왜 굳이 피해자들 신고하라고 했는지 모르겠다”며 “바꿔말하면 살아 돌아오지 말고, 차라리 현지에서 죽었어야 한다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국언 road819@hanmail.net

 이국언님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2008년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이 최종 패소하자, 할머니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뒤늦게 권리회복 투쟁에 뛰어들었다. 208일간의 1인 시위, 10만 서명운동, 일본 원정 투쟁 등을 통해 지난해 해방 65년 만에 미쓰비시중공업을 협상장으로 끌어내 관심을 모으고 있다. 062-36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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