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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 100년에 묻힌 ‘징용 귀국’ 참사
[다시보는 일제강제동원] 17 우키시마호의 비극
귀국선 의문의 폭침…고향 목전 5000여명 사망
이국언
기사 게재일 : 2012-04-27 06:00:00
▲ 마이즈루시에 있는 우키시마호 침몰 사망자 추도 조각상,

 올해 타이타닉호 침몰 100년을 맞아 관련 보도가 봇물을 이뤘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에서 100년 전 벌어진 사건에 대해 경쟁적이다시피 쏟는 관심에 비해 정작 67년 전 우리 민족이 겪은 비극적 사건은 오늘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19대 총선이 끝나자 각 언론은 앞 다퉈 올해가 타이타닉호 침몰 100주년이라며 이에 관한 각종 소식들로 장식했다. ‘20세기를 뒤흔든 초대형 사고’, ‘세기의 참사’, ‘사상 최악의 해양사고’, ‘지구 최대의 불침선’, ‘초호화 유람선’ 등 타이타닉호 침몰 참사나 타이타닉호에 붙여진 수식어도 화려하다. 1997년 제작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의 영화가 크게 흥행한 덕분에 각국에서 침몰 100년을 맞아 각종 기념행사와 더불어 추모 열기까지 이어졌다.

 침몰 100년을 맞아 새롭게 재조명받고 있는 사건은 1912년 4월10일 승객과 승무원 2200여 명을 싣고 영국 사우샘프턴을 출발, 미국 뉴욕으로 향하던 초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가 4월15일 빙산과 충돌해 1500여 명이 차가운 바다에 빠져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특히 타이타닉호는 총톤수 4만6000여 톤, 길이 269m, 너비 28.2m, 높이 20층 건물 정도로 출발 전부터 그 초대형 크기가 눈길을 모았다. 아울러 초호화 내부시설과 첨단기술로 이뤄진 건조방식, 탑승객들의 면면으로 화제가 된 바 있었다.

 그렇다면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은 언론보도처럼 과연 ‘사상 최악의 해양사고’였을까.

 1945년 8월24일 오후 5시20분경, 조선인 강제 징용자 등 한국인 7000여 명을 태운 일본 해군 수송함 우키시마마루호((浮島丸·4730톤)가 일본 마이즈루만 앞바다에서 원인모를 폭발에 의해 갑자기 침몰했다. 이틀 전인 22일 일본 북부해안인 오미나토 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조국 광복의 기쁨을 안은 채 귀향길에 올랐던 조선인 수천여 명도 바다 속에 그대로 수장되고 말았다.

 사건 발생 1주일 뒤, 오미나토 해군 사령부는 사건 발표를 통해 한국인 524명과 해군 승무원 25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선체에 대한 인양조차 하지 않는 상태였다. 더 가관인 것은 승선자 명부조차 공개하지 않은 것이다. 승선자 명부가 몇 명이나 되는지도 모르고, 선체 인양조차 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망자 숫자를 밝히는 그야말로 앞뒤가 안 맞는 일이 벌어진 것. 이것도 부족해 일본은 연합군총사령부(GHQ)에 이 사건을 보고하면서 애초 524명이라던 사망자 숫자마저 260명으로 대폭 축소, 허위 보고까지 했다.

 일본정부는 이 사건을 미군이 투하한 기뢰에 부딪혀 난 사고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의문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만약 기뢰에 의한 폭발했다면 폭발과 함께 물기둥이 솟아야 정상이지만 생존자 어느 누구도 물기둥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또한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은 공중으로 붕 떠서 떨어졌다.

 최근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애초 우키시마마루호는 부산까지 갈 수 없게 돼 있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미연합군이 8월24일 오후 6시 이후부터 항해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애초 부산까지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배를 출항시킨 이유가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애초 부산까지 갈 수 있는 연료도 부족했으며, 부산까지의 항해도 한 장 없었다는 것. 의문은 꼬리를 물고 속속 드러나기 시작한 것.

 일본정부는 사체마저 유기했다. 선체 인양을 미룬 채 수 년 동안 현장을 방치했다. 사건 9년이 지난 1954년 최종 선체 인양이 이뤄졌을 때, 의혹은 보다 명확해졌다. 기뢰의 부딪쳤다는데 선체의 철판이 안에서 밖으로 향해 파손돼 있었던 것이다. 내부에서 폭발했다는 보다 명확한 증거인 셈이다.

 일본정부는 인양된 우키시마마루호를 서둘러 분해해 고철로 팔아버렸다. 이때 인양된 유골들은 도쿄 메구로구(目墨區)의 유텐지(祐天寺)에 안치됐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때 희생된 상당수의 위패를 전범자들이 위패가 보관된 야스쿠니신사에 함께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후 20년 후에 이뤄진 1965년 한일협정 논의 당시 이 사건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우리정부가 이때까지 모르고 있었거나,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2004년 12월 일본 도쿄 최고재판소는 1992년 당시 살아남은 생존자 20명과 그 유족 등 88명이 교토 지방법원에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 최종 기각판결을 내렸다.

 역사상 가장 큰 해난 사고로 알려진 1912년 4월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희생자는 1523명. 이 보다 몇 배나 많은 희생자를 낳은 우키시마마루호는 해방 67년이 넘도록 제대로 된 진상규명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국민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국언


 이국언님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2008년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이 최종 패소하자, 할머니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뒤늦게 권리회복 투쟁에 뛰어들었다. 208일간의 1인 시위, 10만 서명운동, 일본 원정 투쟁 등을 통해 지난해 해방 65년 만에 미쓰비시중공업을 협상장으로 끌어내 관심을 모으고 있다. 062-36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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