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아내와의 이별

 #85 동진은 답답한 마음에 집을 나왔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광주천은 희뿌연 안개를 만들어내고 있다. 맑은 물이 버드나무 사이로 흘러간다. 동진은 안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바지춤을 내리고는 오줌을 갈겨댔다. 참았던 오줌줄기가 솨~ 아 포물선을 그리며 냇가로 떨어진다. 다행히 아직은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이라 동진의 무례를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시원했다. 비우고 나면 이렇게 시원한 것을….

 남광주시장은 이른 새벽인데도 북새통이다. 여수에서 올라온 열차가 멈추자 장꾼들이 우루루 역사로 몰려가 남해 바다에서 잡아온 싱싱한 해산물을 사려고 법석이다. 해산물 거래가 끝나면 그 다음은 보성, 화순 등지에서 생산된 이슬 머금은 농산물들이 주인을 찾아간다. 동진은 이런 새벽시장이 열리는 것을 생전 처음 보았다. 역사 앞에는 열차에서 산 물건들을 펼쳐놓고 손님들을 맞고 있다. 시장사람들 얼굴에는 생기가 넘쳐 난다. 화장실 올라가는 계단에 보따리를 펼치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봤다. 얼굴에 주름이 깊은 걸로 봐서 족히 먹어보였다. “저~ 할머니, 어디서 오셨능게라우~.” 동진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서 왔으면 뭣 헐라고, 그렁 것 묻지 말고 물건이나 사!”할머니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 “아~예, 할머니 살게요. 할머니를 봉께로 촌에서 홀로 계시는 울 엄니 생각이 나서 물어 봤소.” 동진은 얼른 호박 두 개와 오이 다섯 개를 샀다. 할머니와 거래를 끝낸 동진은 계단에서 할머니 얘기를 들었다. 할머니 집은 화순 앵남이다. “자식 놈들은 육남매인디 지금은 다 저금 나서 밥은 묵고 살아. 부지깽이 하나 꼽을 땅 없이 시작한 살림이어도 애끼고 살아서, 지금은 논만 해도 가뭄에도 걱정 없는 문전옥답으로 열 닷마지기여.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멀크락으로 홈을 파는 사람이라고 부르제.” 멀크락으로 홈판다는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다시 물으니 “머리카락이 얼마나 작냐? 그 작은 것을 갖고 홈을 팔라면 얼마나 아끼고 힘이 들 것이어”하신다.  지나치게 아낀다는 표현인 것 같다. 할머니는 손을 내밀면서 “시상을 살아 본께, 어쩌면 그렇게 이치가 맞는지.” 그래서 그 이치에 맞게 살아야 된다고 하신다. “이 손이 이렇게 구부러지게 일을 했으니, 우리 아이들이 밥을 먹게 되었제. 옛 말에 보리 안팬 3월 없고, 나락 안팬 6월 없다고 했는디, 그 말이 딱 맞대. 천지자연은 시절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어. 그란디 이 놈의 인간들은 약속을 안 지킨단 마시. 그래서 서로를 믿지 못하고 사니께 힘이 들제. 우리 시골에는 지금도 뭣이든지 색 다른 것 있으면 담 너머로 나눠 먹는 다네.”

 할머니의 얘기를 듣고 난 동진은 잠시 아픈 아내를 잊고, 시골에 홀로 사시는 엄니 생각을 했다. 혼자 계시니까 우리랑 같이 살자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하셨다. 자기도 이쁜 손주들 거들고 며느리가 해준 맛난 반찬 먹고 살고 싶지만, 자기 손톱발톱 자지라지게 작만 한 토지 묵힐까봐 한사코 거절하고 혼자 사신다.

 계단에서 할머니의 얘기를 듣고 나니 어느새 날이 훤히 밝았다. 북적대던 사람들은 썰물 빠져 나가듯 사라져 버렸다. 할머니와 동진이 그리고 청소부 아저씨만 남아있는 광장 여기저기에는 그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잔뜩 쌓여있다. 할머니와 작별을 한 동진은 어디로 갈 것인지도 정하지 못하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86아내가 암 수술을 한지 꼭 14개월이 된 날이었다. 그 동안 항암치료와 소위 민간요법이라는 단방 약까지 안 써본 것이 없을 정도로 다 써보았다. 하지만 병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아침에 주치의가 회진을 돌면서 동진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 장례준비 하세요.” 동진은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다리가 후들 거렸다. 아무생각도 나지 않았고, 아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병실을 604호실로 옮기세요.” 담당 간호사가 말했다.

 2월28일 새벽 4시40분. 아내는 마지막 말을 했다. “나 이대로 가는 겁니까? 가라면 가겠어요. 하지만 당신 사랑한 것은 기쁨이었어요. 겉으론 표현하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서 당신 한 사람만을 의지하고 사랑했어요. 그러나 이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려 하니 가슴이 아파와요. 하늘나라에 가서도 당신을 위해기도 할게요. 당신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말이에요.” 아내는 말을 잇기가 무척 힘이 드는 것 같아보였다. 잠시 눈을 감고 긴 숨을 내쉬더니 “나 없이도 잘살아 가겠지만, 막내 녀석이 자꾸 눈에 밟히네요. 아무튼 나 대신 잘 보살펴주세요. 그래서 세상에서 쓰임 받는 아이로 키워주세요.” 아내는 침을 한번 삼키더니 혼잣말처럼 “시골에 계신 엄니는 무얼 하고 계실까,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시고 논에서 일하고 계실까, 며느리 앞세우고도 일만 하실까?” 하더니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내 손을 잡았다.다. 아내의 큰 두 눈이 촉촉해졌다. “당신 정말 사랑했어요. 이대로 눈을 감으려니 너무나 아쉽네요. 앞으로는 그렇게 미워하지 마세요. 진솔하게 당신만을 사랑했는데, 이게 뭐에요.” 평소에 보이지 않던 그녀의 원망의 말이 이어졌다. 그녀는 절규하듯 “하나님, 절 정말로 데려 가시렵니까? 너무나 아쉬워요. 이대로 떠나기에는….” 그녀는 잠시 내 손에 그녀의 얼굴을 파묻더니 “하지만 하나님, 순종할게요. 그리고 당신 정말 사랑했어요. 안녕히 계세요. 힘들고 어려울 땐 항시 하나님 의지하고 기도하세요.” 그리고 몇 번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눈물 한 방울 떨어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내는 그렇게 51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글=민판기 삽화=정승욱


 민판기 님은 마을 공동체의 힘으로 세상을 바닥까지 환하게 비추려는 사람이다. 주민자치의 숨결 속에서 삶의 내밀한 의미를 건져낸다. 송화마을에서 주민들이 주인이 되는 문화난장을 열고, 송화공부방을 통해 아이들의 꿈을 키운다. 뒤틀린 세상에 던지는 그의 질문은 늘 삶의 정곡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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