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어디로 갈꺼나

 #87 서해를 따라 북상할 예정인 태풍은 특히 지리산 일대에 많은 비를 뿌릴 것이라는 예보다. 동진은 갈까? 말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지리산에서 태풍과 만난다는 모종의 모험심이 동진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그곳. 연곡사에서부터 걷기 시작한 산행은 피아골 산장까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계곡을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에도, 가파른 언덕의 산길도 아무 생각 없이 마냥 걸었다.

 동진은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낸 지 삼 년이 넘었는데도 그녀를 온전히 떠나보내지 못하고 무상, 무념의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마치 갈 곳을 잃어버린 뜬 구름마냥. 그래도 어쩌다 좋은 일이 생기면 마음속으로 `당신이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혼자 마음만 간절했다. 이번 지리산 산행도 내심 태풍에 뿌리 째 뽑힌 나무신세가 돼버리거나 아님 굉음을 내며 무섭게 달리는 계곡물과 함께 정처 없이 떠내려가는 산 쓰레기 신세가 되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산장에 도착한 동진은 여장을 풀고 산장 한 쪽에 있는 취사장에서 라면을 끓였다. 스프를 넣고 텃밭에서 따간 고추를 썰어 넣으니 매콤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그는 뜨거운 라면을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잘 익은 묵은 김치를 곁들여 먹는 라면은 기가 막혔다. 마지막 국물 한 방울 까지 마셔버린 동진은 가만히 누워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태풍이 몰려온다는 예보와는 달리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한참을 바라보던 동진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취해 스스르 잠이 들어버렸다.

 #88 고향 뒷산이다. 저만치 아내가 서있다. 텃밭 옆으로는 이름도 모르는 수만 송이 꽃들이 피어있고, 아름다운 화관을 둘러쓴 아내는 화사한 미소로 나를 반긴다. 동진은 너무나 반가워 아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아내는 다가가면 더 멀리 멀어져 갔다. “나요, 나! 당신이 그렇게 사랑했다던 나란 말이요. 그 동안 당신 없이 어떻게 살아온 지 알기나 해요. 당신이 나를 남겨두고 떠나 가버린 뒤, 행여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날마다 대문을 열어놓고 기다렸어요. 그러다가 당신의 환영을 보면 이렇게 노래했어요.”

 <그리움 너머로 갸름한 얼굴/ 초췌한 당신이 가까이 와서/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두 손을 벌려 손을 잡으려 하면/ 당신의 손은 잡히지 않고/ 그림자만 남는다/ 그러고는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무서운 적막이 찾아 든다/ 아무도 없는 빈방에는/ 재깍재깍 시계만 움직 인다./ 새벽 세시 반/ 언제쯤 어둠이 걷히려나/ 나는 그럴 때마다/ 당신을 향해 소리를 질렀어요/ 가지 마세요/ 그리고 내 곁에 있어줘요/ 시간이 길고 짧음은 말하지 않겠어요/ 이 말라버린 차가워진 가슴에/ 다만 당신의 따스한 마음이/ 깃들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영원히 떠나지 않고/ 머물게 해주세요.>

 “내가 언제 가장 힘든지 아세요? 새벽 그리고 해 떨어질 때에요. 해가 떨어지면 반갑지 않은 어둠이 찾아오고, 당신이 와 있을까봐 정신없이 방문을 열어보면 싸늘한 냉기만이 가슴을 후벼요.” “옛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던 `조강지처를 잃어버리면 가슴에 피멍이 든다’는 말이 새록새록 생각이 난답니다. 그래도 살기위해 허기진 뱃속 채우려 시레기 국에다 차디찬 밥 말아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숟가락질 하려니 미칠 것만 같아요. 누워 있다가 가슴이 답답해지면 벌떡 일어나 방안을 빙빙 돌다가,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아 논어를 읽어보아도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아요. 그렇게 뒤척이다가 새벽이 오면 대문열고 나가서, 다시는 오지 못할 먼 길 떠난 당신을 기다리다 털썩! 마당에 떨어진 신문 주워다가 한 줄도 빼지 않고 읽어보지만 무엇을 보았는지 하나도 기억이 없어요. 그렇게 당신을 기다렸는데, 당신은 왜? 자꾸만 멀어져 가는 거요. 눈이 내릴 때면 당신이 잠들어 있는 영락공원 찾아가 추운데 어찌 지내느냐고 물었지요. 그래도 당신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지요. 또 눈이 내려 발자국 따라 걷다가 행여 우리 집 대문을 잘 못 찾을까봐 내 못난 사진을 붙혀 놓았지만, 당신은 한 번도 얼굴 내밀지 않았지요. 그렇게, 그렇게 꿈길에서나 만날까 기다리고 기다린 세월 속에서 이제 보고 싶던 당신을 보았는데 당신은 왜? 자꾸만 나에게 멀어져 가는 거요. 가지 마세요!”

 동진은 다가가면 갈수록 멀어져 가는 아내의 손을 잡으려 바둥거렸다. 그러기를 몇 시간인가?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꿈이라 해도 너무나 생생한 장면들이라 다시 꿈속으로 빠져 들고 싶었다. 눈을 감아 보았지만 아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동진은 준비해간 노트를 꺼내 아내에게 돌아오지도 못할 편지를 쓰기 시작 했다.

 <사랑하는 당신/ 어제는 텃밭에/ 당신이 좋아하는 상추를 심었습니다./ 아침저녁 사랑으로 가꾸었더니/ 제법 먹음직스럽게 자랐습니다./ 당신은 늘 그랬지요./ 무더운 여름 날 마루에 걸터앉아/ 풋 고추에 된장 찍어 입 안이 터지도록 밀어 넣어/ 고르지 못한 세상을 씹었지요./ 입안에서 녹아드는 풋풋한 그 맛을/ 어떻게 잊고 지내시는 지요/ 어서 돌아오세요./ 당신이 돌아오시면/ 당신과 함께 마당에 수북이 자란/ 잡초를 뽑고 싶습니다./ 말라버린 화분에/ 물을 뿌리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먼지 푸석한 집안에/ 웃음 꽃 피어나게 해주세요.>  


글=민판기 · 삽화=정승욱


 민판기 님은 마을 공동체의 힘으로 세상을 바닥까지 환하게 비추려는 사람이다. 주민자치의 숨결 속에서 삶의 내밀한 의미를 건져낸다. 송화마을에서 주민들이 주인이 되는 문화난장을 열고, 송화공부방을 통해 아이들의 꿈을 키운다. 뒤틀린 세상에 던지는 그의 질문은 늘 삶의 정곡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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