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동 연가 제45회

 #97 동진이 방림동 산동네에 있는 집에 들어서자 서쪽 하늘에 저녁놀이 붉은색으로 피어나고 풀벌레들이 여기저기서 울어댔다. 방안에서는 아이들이 아무 소식 없이 떠났다가 돌아온 아빠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아빠다. 많이 걱정했지? 미안하다.” 남광주시장에서 사들고 온 튀김 보따리를 던져 주었다. 아이들은 따뜻한 튀김보따리를 받아들고 좋아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정신없이 누에가 뽕잎을 먹어대듯 따끈한 튀김을 입으로 가져가 허천스레 먹어댄다. 큰딸 국희가 오징어 튀김을 입안 가득히 밀어 넣으며 “아냐 괜찮아, 아빠 몸은 건강해? 아빠 우리들 걱정 하지 말고 어떡하든 건강을 잃으면 안 돼 알았지?” “그래 알았다. 너희들도….” 동진은 벌써 철이 들어버린 아이들에게 딱히 할 말을 잃었다. 가만히 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내가 떠난 뒤로 한 번도 개지 않고 깔아진 눅눅한 이불 위로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천장에서 누군가가 동진을 내려다본다. 낯익은 형상이 보였다가 다시 사라진다. 여자가 울고 있다. 낮은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간헐적으로 끊어지다가는 다시 이어지는 낮은 휘파람 소리 같기도 했다. 동진은 직감적으로 아내라고 생각했다. 정 많은 사람! 아내의 환영을 향해 동진은 이렇게 원망했다. `어젯밤 당신은 이렇게 말했지요. 어서 오라고. 그렇게 말해 놓고선 다가서려 하면 왜 얼음보다 차갑게 마음의 벽을 쌓아놓고 날 거부하시나요. 그러지 마세요. 갈바람도 차가운데 왜 그래요. 내 맘속에 너무 깊게 자리한 당신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요. 저도 알아요.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현실에 그렇게 냉정하게 대하신다는 것. 그래서 적막이 깃든 빈방에서 울고 있어요. 그 적막이 싫어 거리에 나서면 잿빛 빌딩 사이로 가로등 불빛만 외롭게 서 있어요. 그렇게 거리를 헤매다가 새벽안개 내리면 광주천에 가서 하얀 두루미를 친구삼아 보려 하지만, 내가 가까이 가면 그만 달아나 버려요. 산다는 것은 이렇게 혼자 세상을 헤매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저를 심하게 흔드는 것은 바람도 달빛도 아닌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이지요. 오늘은 당신이 남기고간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렵니다.’

 

 #98 사랑하는 내 아들아! 우린 각자의 화분에서 살아가지만 햇빛을 함께 받는다. 내가 너와 같은 핏줄인 것 하나만 빼면 각자 해야 할일이나 갈 길이 다르다. 다만 화분에 여린 싹이 자랄 때까지 보살펴줘야 하는 게 아빠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어린 싹이 튼실하게 자라게 하려면 거름도 주고 약도 해주고 물도 뿌려줘야 튼실하게 자랄 수 있는데, 아빠는 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구나.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못했구나.

 아들아! 하지만 이런 보살핌 없이도 씩씩하고 반듯하게 자라서 이젠 아빠보다 키가 한 뼘 쯤이나 더 큰 너를 보면 든든한 마음이 들곤 한다. 네가 아주 어렸을 적에 시골 골목길에서 아빠와 야구연습 하던 기억나니? 그때 너는 아주 정교하게 공을 아빠 글러브에 집어넣어 아빠를 기쁘게 했었지. 또 어떤 때는 할아버지 등에 업혀 가을 숲길을 걷기도 했었지. 광주로 이사 와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단 한 번도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해 미안하다. 그러니 너와 나는 대화가 끓어지고 서로를 알지 못해 걸핏하면 아빠는 야구배트로 너희들을 야만적으로 훈육했지. 그러면서 아빠는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아빠!” 하고 달려드는 너희들을 보고는 마음이 아파  혼자서 울곤 했단다.

 아들아! 이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오늘날 이 세상이 무자비 하다면 우리의 무자비한 태도와 행동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변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을 바꾸는 것은 우리가 매일 쓰는 언어와 대화 방식을 바꾸는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 말은 간디가 비폭력과의 대화에서 한 말이다. 목회자가 되려는  너에게 꼭해주고 싶은 말이다. 우리아들은 착해서 그러지 않겠지만, 너의 말 한마디에 한 마리의 양이라도 상처받으면 안 된단다. 다음으로는 사촌이 배 아플 짓 말아라. 세상 그 누구에게라도 조그마한 원한이 없게 해야 한다. 네가 잘되면 너를 아는 모든 이들이 기뻐하게 너의 이웃부터 잘 보살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사촌이 논을 사면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속으로는 배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그가 알게 모르게 이웃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아들아! 너는 주위가 잘되면 손뼉을 치며 환호하고, 작은 것도 나눠 먹고 따뜻하게 보듬어라. 그리하여 닫혀 진 창문을 활짝 열고 마음을 열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심을 찾도록 해야 한다. 우리들은 흔히 집에서 기르는 개나 닭을 잃어버리면 그것을 찾으러 다니지만, 정작 중요한 마음을 잃어버리면 도대체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돈이나 명예를 찾아다니기보다는 잃어버린 양심을 찾아야 하는데 말이다. 마치 구부러진 무명지 손가락을 다쳤다면 천리 길도 마다 않고 나서서 고치려고 하면서 구부러진 마음을 고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너는 이런 뒤틀린 마음들을 바로잡아 인도하는 직업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늘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글=민판기, 삽화=정승욱


 민판기 님은 마을 공동체의 힘으로 세상을 바닥까지 환하게 비추려는 사람이다. 주민자치의 숨결 속에서 삶의 내밀한 의미를 건져낸다. 송화마을에서 주민들이 주인이 되는 문화난장을 열고, 송화공부방을 통해 아이들의 꿈을 키운다. 뒤틀린 세상에 던지는 그의 질문은 늘 삶의 정곡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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