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인물의 정신을 담는 초상화

▲ 변월룡 작 `민촌 리기영’, 78.5×59cm, 캔버스에 유채, 1954.
 한반도 분단의 주역이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을 전북도립미술관 초상화전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군복을 입은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옆에 앉은 초라한 모습. 한국 국방부 소속 한국 화가가 그렸는데도 아이젠하워는 위풍당당하게 제스처를 취하며 탁자 앞에 앉아 있고, 이승만은 탁자 옆에 비루한 노인처럼 그렸다. 일본 대신 남한을 차지한 미국 대통령과 자신의 노욕(老欲)을 채우기 위해 미국 대통령에게 공손하기만 한 한국 대통령의 비굴한 자세가 우연히 역사의 기록으로 남았다. 이승만의 개인 초상화는 없었다.

 초상화의 힘은 그림에서 그 시대와 그 인물의 정신을 볼 수 있을 때 나온다.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에도 초상화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초상화는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 속에서 그 인물의 정신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인 것이다. 만약 그 인물의 정신을 볼 수 없다면, 그리고 세밀한 묘사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짝퉁 초상화에 불과하다. 단순히 외모만 비슷하게 그린다고 초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북이 잊은 천재 화가 변월룡

 

 한반도의 경우에도 초상화가 그려졌지만, 아쉽게도 조선시대 이전의 자료들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고분벽화 속 인물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전신을 담은 어진(御眞)을 중심으로 고관대작이나 선비들의 초상이 그려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존하는 어진은 몇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상화 등과 비교하면 한국의 초상화 역사는 많이 부족하다 할 수 있다.

 한국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위인들의 초상화가 남아있지 않고 후대에 마구 난립되어,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표준영정이라는 것이 제작된다. 당시 최고의 화가들이 현장을 방문하고 후손들의 골격을 참고하며 그렸지만, 아무래도 상상으로 그린 것이라 살아있는 정신을 느끼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그나마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이 전시에서 만난 뜻밖의 작품이 있었다. 수많은 초상화들 중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수작이었다. 남과 북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천재화가 변월룡.

 변월룡은 일제 강점기 연해주에서 성장한 조선인이었다. 러시아 최고의 명문 미대인 레핀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951년에는 박사학위를 취득, 레핀미술대학 정교수까지 지낸 인물이다. 1953년 북한 당국의 초청을 받아 북한에 1년 6개월 정도 체류하면서 평양미술대학의 설립을 돕고 체류기간 동안 만나 북한 문화계 인사들의 인물화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농민문학의 선구자 리기영

 

 오늘 소개하는 초상화의 주인공은 민촌 리기영(1895~1984)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4년 농민들에 대한 착취와 투쟁을 묘사한 장편소설 ‘고향’을 출간한 우리나라 농민문학의 선구자.

 광복 후 월북한 작가는 이 그림이 그려진 1954년 당시 북한에서 그의 땅과 농민을 주제로 하는 대표작 ‘두만강’을 발표. 이후 1957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1972년 사망 당시 북한 문예총 위원장 자리까지 역임한 다분히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소설가라고 한다.

 그런 리기영이 1954년 자기 인생의 최고 절정기에 있었을 60세 무렵, 어두운 벽에는 큰 꽃그림이 걸려 있고, 그는 붉은 색 1인용 소파에 앉아 한손은 책 위에 한손은 턱을 고이고 사색에 잠겨있다. 신사복 왼쪽 가슴에는 고위간부들이나 다는 계급장 같은 것이 있어, 이 인물이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짐작하게 한다. 오른쪽에서 비추는 빛이 그의 얼굴 하단부와 손을 밝게 하지만 조금 나온 입술과 주름은 이 인물이 뭔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방안의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와 소품 하나하나 그리고 인물의 주름과 눈빛 모두 그 시대의 분위기와 인물의 정신을 말해주는 데 기여하고 있는 수작이다.

 변월룡은 러시아 문부성의 파견으로 평양에 체류하면서 많은 문화계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북한의 미술발전을 도왔지만, 북한으로의 영구귀국을 거부하면서 1954년 러시아로 일시 출국한 이후 다시는 북한을 가지 못하고 평생을 러시아에서 살았다.

 러시아 최고의 미술대학교 교수였고, 남한도 북한도 모두 그의 고국이건만, 그는 1954년 이후 한반도에서 잊혀졌다. 변월룡도, 리기영도 모두 죽고 없는 지금 유일하게 변월룡이 그린 리기영의 초상화만 남아 과거의 역사를 조용히 말해주고 있다.

변길현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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