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 표현, 색·비·이름·냄새의 잔향

▲ 에쿠니 가오리(소설가) 저 | 김난주(번역가) 역 | 소담출판사.
 마르셀 프루스트 저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면, 주인공이 마들렌이라는 과자 한 조각을 홍차에 적셔서 입에 무는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옛 추억들이 흑백사진에서 칼라영상으로 살아 움직여 밀려드는 벅찬 감격과 함께 과거의 일들을 끊임없이 길어 오르는 장면이 있다. 이를 ‘마들렌 효과’라고도 부르는데, 흔히 우리가 특정한 어떤 물체와 자신이 과거에 경험한 시간들을 연결시키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사람은 오감 중 어딘가를 갑자기 자극받는 순간,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이처럼 기억과 오감은 깊은 관계가 있다. 에쿠니 가오리의 ‘Rosso’에서는 신체의 오감과 감성을 연관 지어 잘 표현하고 있다.

 ‘색’은 시각적 감각을 이용하여 그에 따른 심리까지 읽을 수 있는 장치이다. 로쏘에서 ‘흰색’은 “쓸쓸함”, “흰색은 어울리지 않아” 등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로도 묘사된다. 아오이는 쥰세이와 헤어진 뒤에는 자주 흰색을 입고 있다. 이는 두 사람이 헤어진 후 아오이가 “심플한 게 좋아. 무위가 좋아”라고 한 독백과 맥을 같이 한다. 한편 ‘파란색’에 대해서는 어떤 느낌일까? 아오이는 ‘파란색’을 보고 과거를 떠올린다. ‘파란색’은 원래 ‘그리움, 우울’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본문에서는 ‘사랑스러움’과 연관되어 표현된다. 이처럼 색에 대한 감각 중 ‘흰색’에 대해서는 쓸쓸하고 부정적인, 어두운 이미지, ‘파란색’에 대해서는 옛날을 그리워하는 키워드로써, 사랑스럽고 따뜻한 밝은 이미지가 연출되어 있다. 따라서 아오이를 냉정으로, 쥰세이를 열정으로 읽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흰색과 파란색, 쓸쓸함과 사랑스러움

 

 다음으로 ‘비’에 대해서이다. 비는 청각과 시각을 자극하는 장치인데, 작자는 ‘비’를 사용하여 ‘만남과 이별’을 표현하고 있다. 본문에서 ‘비’는 ‘헤어짐’과 오버랩 된다. 아오이는 ‘이별’의 순간, 비가 내리고 있었다는 것에서 ‘비’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별을 떠올리며 우울해진다. 또한 “죽고 싶어지는” 비와 함께 그녀에게 이별은 크나큰 아픔이었다는 걸 짐작하게 한다. 눈이나 비가 올 때 인간은 이성적 저항력이 현저히 저하된다. 이러한 심리적 변화, 동요가 느껴질 때 받은 상처는 그 깊이를 더한다.

 다음으로 ‘이름’을 부를 때, 불리었을 때의 감정에 대해서다. 우리들은 흔히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리었을 때 특별한 잔향(殘響)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있다. 저마다의 부르는 방식, 울림 등에서 누군가를 호명하는 목소리는 청각을 자극하는 것 중 하나이다. 로쏘에서는 아오이가 쥰세이에게 불리었을 때 “아오이. 단 한마디로 쥰세이의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쥰세이는 아오이의 이름을 쥰세이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발음했다. 나는 그에게 이름을 불리는 것이 좋았다. …아오이. 쥰세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그 만큼 행복으로 충만할 수 있었다.” (p.225)고 쓰고 있다. 이처럼 그 만의 발성법에 의한 울림, 쥰세이의 부드러운 목소리라는 청각적 표현을 통해, 자연스럽게 “행복하다”는 정서로 연결된다. 또한 “‘쥰세이’.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리자, 그 이름은 어두운 부엌에 엄청난 위화감을 가져다주었다. 엄청난 위화감과, 눈사태 같은 그리움을.”(p.177) 등 아오이가 부르는 쥰세이의 이름은, 그 울림으로 인해 청각을 통한 체감이 기억으로서 강하게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 울림은 마빈과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위화감’을 주지만, 감정의 속도는 ‘눈사태’와도 같이 갑작스러운 불가항력적 무게로 다가온다.

 ‘냄새’에 대한 이미지는 어떻게 연출될까? “다카시에게서 도쿄 냄새가 났다. 딱히 어디가 어떻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손과 발과 분위기와, 다카시의 동작 하나하나가 나로 하여금 도쿄를 떠올리게 한다.”(p.96) 아오이는 도쿄에서 지낸 지난날의 추억을, ‘길게 줄을 선’ 일본인의 행동과 냄새에서 쥰세이의 냄새를 기억해 낸다. 이처럼 아오이의 감각은 시종일관 촉수가 되어 민감하게 쥰세이를 더듬어 추억하고자 한다.

 

 연애의 심리 - 로맨틱 러브에서 합류적 사랑으로

 

 로쏘의 서두에는 “아가타 쥰세이는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 눈동자도, 그 목소리도, 불현듯 고독의 그림자가 어리는 그 웃음 진 얼굴도. 만약 어딘가에서 쥰세이가 죽는다면 나는 아마 알 수 있으리라. 아무리 먼 곳이라도,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어도……”(목차 앞 서두)라고 적혀있다. 작자는 소설의 서두에서 이처럼, ‘잊을 수 없는’ ‘순수한 사랑’, 즉 ‘지고지순’한 로맨틱 러브를 전제로 스토리를 전개하겠다는 의지를 독자에게 강력하게 전달하고자 한다. 에쿠니는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사랑이 변하지 않고 계속될 리가 없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런 말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사랑을 하며 사는 커플도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사랑한다. 사실을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불가능하다고는 보지 않아요.” 즉 소설은 이러한 작가의 이상적 연애관의 표출로 보인다.

 그렇다면 아오이에게 쥰세이는 어땠을까? 아오이에게 쥰세이는 “내 인생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터무니없는 무엇이다.”(p.97) 로 표현한다. 즉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해 불가능한 ‘무엇(=존재)’으로 풀이 할 수 있겠다. 또한 같은 귀국자녀로서 일본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할 때 알게 되어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두 사람이 함께 지냈을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는 우메가오카에 있는 쥰세이의 아파트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 - 어지러울 정도로 즐겁고, 모든 감정이 응축된 농밀한 시간 - 을 보냈는지 모른다. 우리는 둘 다 열아홉 살이었고,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리고 야만적인 사랑을 했다. 야만적인, 자신의 전존재로 서로에게 부딪치는, 과거도 미래도 미련 없이 내던지는. (중략) 어디를 가든 함께였다. 따로 떨어져 있어도 함께였다. 모든 것을 얘기했다. 어릴 때 일, 부모님, 우리 집에서 일했던 가정부. 우리는 각기 뉴욕과 밀라노라는 멀고도 먼 다른 곳에서 태어났고 자랐지만, 줄곧 서로를 찾고 있었다고 확신했고, 고독했었다고도 했다.” (p.98) 즉 아오이와 쥰세이가 추구하는 사랑은 “자신의 전존재로 서로에게 부딪치는”,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는, 즉 육체만이 아닌 정신을 나눌 수 있는, 그야말로 로맨틱 러브의 ‘전존재’와 ‘대화’가 결합된 현대의 ‘합류적 사랑’의 모델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에쿠니는 연애에 대해 “내가 가진 전부를 내놓는다 해도, 나에게는 너뿐이다. 네가 필요해. 단 한 순간이라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 내게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중략) 자신의 머리와 마음, 그리고 몸, 상대의 머리와 마음, 몸, 이것만을 사용해서 세계를 재구축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라고 역설한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를 ‘재구축하는 일’이라고. 에쿠니는 사랑을 하게 되면, 두 사람의 감정만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재구축하여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작가의 애정관이 로쏘에는 짙게 배어있다.

 이처럼 로쏘에서는 신체적 감각, 즉 시각, 청각, 후각을 이미지와 연결하여 자연스럽게 감정을 연출하며 독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해 간다. 심리묘사 또한 탁월하여, 로맨틱 러브의 ‘너 아니면 안 돼’의 정서가 밑바탕에 그려지면서, 한편으로는 100%의 자신으로 타인을 대하는, ‘야만’이라 표현될 만큼 감정에 충실한, 진실, 진짜 사랑이 고풍스런 도구에 의해 제시된다.

명혜영 <무등지성 강사>



필자는 학문공동체 `생생공감의 무등지성’(협동조합)에서 매주 화요일 `일본문학’을 강의한다. 위의 글은 제8기 강좌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현재, 1월7일(화)부터 제10기 강좌 <뫼비우스의 띠로서의 실종, <욕망>의 행방 ;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를 강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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