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백인처럼 말하는군요”
식민지 본국 동경 `흉내내기’
지배세력 부당 폭력에 끊임없이 문제 제기

▲ 검은피부 하얀가면, 프란츠 파농 저, 이석호 역, 인간사랑.
 ▶파농에 대한 해석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가, 사회과학자이자 혁명가인 프란츠 파농은 1925년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 섬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의사이자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의 투사로서 활동하였다. 비록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파농주의”라는 용어에서 찾을 수 있듯이 그의 치열했던 삶은 후세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파농주의는 크게 고전적 파농주의와 비판적 파농주의로 구분되는데, 고전적 파농주의는 1960년대 아프리카 민족주의, 이슬람 근본주의, 미국의 신좌파, 흑인 과격 단체 등에서 주창하는 것으로 마르크스적이고 실천적인 파농만을 부각시킨다. 이들은 특히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나 ‘아프리카의 혁명을 위하여’와 같은 후기 저서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제3세계 반식민 투쟁의 일환이자 민족해방의 측면을 강조한다.

 반면, 비판적 파농주의는 19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식민주의, 문화연구, 정신분석학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실천가라기보다는 이론가로서의 파농을 분석한다. 따라서 비판적 파농주의에서는 파농의 초기 저작인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바탕으로 정신분석학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파농의 이름 앞에 붙는 수많은 수식어만큼이나 후대의 학자들과 이론가들은 매우 다양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이론의 틀을 가져다 파농을 해석하고, 재전유하고 있다.

 

 ▶이중 왜곡에 희생된 불운한 사상가

 파농이 활동하던 당시 프랑스 우파에서는 모국 프랑스를 배신하고 식민지 알제리 민중의 편에서 싸운 반역자라고 비난하였고, 좌파에서는 유럽인 전체를 식민주의자로 매도하고 폭력을 옹호하면서 농민 대중을 지나치게 중시한 과격하고 시대착오적인 사상가라고 폄하하였다. 당시 영미권에서는 유독 파농의 검은 피부 자체만 강조되면서 흑인해방의 사상가로 우상화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파농은 축소와 확대라는 이중의 왜곡에 희생된 가장 불운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파농은 폭력의 옹호자가 아니라 사회의 폭력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누구보다도 깊이 사유한 사상가이다. 즉, 파농은 식민지 사회의 정신과 의사로서 식민 지배세력의 폭력이 식민 지배자 자신이나 피식민인의 인격을 어떻게 파괴해 가는지를 구체적인 현실로 경험했고, 식민지 민중이 지배문화의 굴레에서 벗어나 어떻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파농이 경험했던 알제리에서의 삶을 중심으로 그의 전기를 쓴 알리스 셰르키는 파농을 “언제나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파농이야말로 그의 검은 피부 때문에 백인사회를 증오했던 사람이 아니라, 검은 피부 덕분에 소수파에 대한 차별에 남다른 민감성을 지니고 지배문화와 지배세력의 부당한 폭력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했던 사람이다.

 

 ▶피식민 흑인과 식민 백인의 관계

 파농의 초기작인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피식민 흑인과 식민 백인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거기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 언어의 폐기, 백인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 식민자의 시각에 의해 정형화된 흑인의 열등성 및 식민자들만이 스스로 인정하는 백인의 우월성 등을 정신분석적인 입장에서 살피고 있다.

 특히 파농은 고향섬인 마르티니크 사람들의 식민화된 모습과 그들을 열등하게 만든 백인들의 실례와 여러 문학작품 및 기타 저서들을 인용해가며 식민화의 결과가 초래한 양상들을 자신이 논의하는 문제점들에 대한 답의 논거로서 제시한다.

 파농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마르티니크 유색인종들의 예를 들면서 식민화로 인하여 자국 언어의 폐기와 식민지 본국 언어에 대한 동경과 모방에 대한 문제를 논한다. 쉽게 이해하자면 언어란 타자를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기 위하여 생성된, 의사소통을 위한, 일종의 매개체이다. 그러나 언어란 이 단순하고 가장 기초적인 의사소통의 역할을 토대로 강자들이 약자들에 대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 모든 지배는 지배하려는 자에 대한 동경과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백인 프랑스인의 지배를 받은 마르티니크 흑인들 또한 식민지 본국에 대한 무의식적인 동경과 그들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의 문제가 언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앙띨레스 청년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금은 다소 영어에 대한 열기가 한풀 꺾인 추세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영어에 대한 열망은 “r” 발음을 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혀를 굴리면서 마치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화자들처럼 되고자 안달하는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과 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대화를 들은 모국어 화자들은 마치 “교과서처럼 말하는군요”라고 말하고, 정작 마르티니크에서는 “마치 백인처럼 말하는군요”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파농이 예로 들었던 흑인들이 백인들처럼 말하는 것은 포스트식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의 하나인 “흉내내기”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피진이나 크레올을 사용하는 흑인은 모국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백인 프랑스인들에 대하여 열등의식을 가지게 되고 최대한 백인처럼 말하기 위하여 프랑스어를 흉내내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크레올어 사용의 금지가 마르티니크에서 제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즉 학교교육을 통하여 식민지 언어인 프랑스어만이 유일한 공식 언어로서의 권위를 갖고, 이에 따라 마르티니크인들이 사용하는 크레올어는 기피되어야 하고 폐기되어야 하는 하층민의 언어로 전락한다. 식민화의 단계에서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피식민 언어의 폐기와 열등의식은 피식민인들로 하여금 자동적으로 식민지 언어에 대한 우월성과 그 언어를 모방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도록 만든다. 이 때 파생하는 것이 바로 과잉된 “r” 발음의 발화이며, 흉내내기의 표본이 된다.

 

 ▶백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파농은 한 가지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로서 프랑스에 거주 중인 여러 민족의 프랑스어 사용에 대한 예를 들고 있다. 러시아인이나 독일인으로서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 어떤 열등감이나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백인들은 이러한 현상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이들에게 친절하게 길안내를 도와준다고 묘사한다. 그렇다면, 프랑스에 거주 중인 마르티니크인들, 즉 흑인들은 어떤가? 그들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파농의 지적이다. 식민언어인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하는 흑인들은 자신들의 무능함에 대해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고, 크레올어에 대한 열등의식과 더불어 식민언어를 더욱 유사하게 모방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느끼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파농은 또한 흑인이 백인이 되고자 하는 또 다른 욕망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 예로서 같은 흑인일지라도 마르티니크 흑인과 세네갈 흑인 사이에는 또 다른 문화적, 인종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마르티니크 출신 흑인은 자신이 백인에게 받았던 인간적인 모멸감과 열등의식을 그대로 똑같이 덜 문명화되고 더 까만 피부를 가진 세네갈 출신 흑인에게 갖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마르티니크 출신인 자신을 보고 “세네갈 출신이예요?”라고 물으면 과도하게 흥분하고 어떻게 세네갈 흑인과 자신을 비교할 수 있느냐 라고 반문한다는 사실은 백인들의 식민화가 만들어낸 잘못된 잉여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을 당한 피식민이 또 다시 다른 민족이나 인종에 대하여 식민화를 시도하는 오류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흑인들의 열등성에 대한 정형화가 이루어지면서 백인들은 그들 자신의 우월성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현주<무등지성 운영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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