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 속에서도 세상은 움직인다

 안개비 한 잎 적셔 다물지 않기로 했다

 계곡물 졸졸대며 乳腺 타고 오르는

 한낮의 고요 속으로 고요가 되는 순수

 -김영재, ‘고요 -물봉선’ 전문. ‘현대시학’ 10월호.

 

 정중동(靜中動)은 정적인 고요함 속에서도 세상은 움직인다는 말이다. 고요한 상태는 세상의 역동적인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현 존재를 유지하며 자연스러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중동이란 말의 의미는 바로 그런,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는 모습이다. 깨끗함 속에서도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내보이고, 맑음 속에서도 혼탁함이 있고, 정지한듯 보이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몸짓, 정중동(靜中動)의 세계를 김영재 시인은 ‘물봉선’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요하다는 것을 답보(踏步)의 상태나 정체(停滯)된 것으로 오해할 수가 있다. 그들은 외부로 쉽게 감지되는, 천변만화(千變萬化)나 역동적(力動的)인 몸짓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움직이며 소란스러운 일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하는 고독의 시간이 오면, 그 소란스러움이 얼마나 덧없고 부끄러운 일인지를 스스로 깨닫기 시작한다.

 

 물봉선을 통해 본 정중동의 세계

 ‘고요’라는 시에서 김영재 시인은 물봉선을 바라보며 고요 속에서 꿈틀대는 미세한 움직임들을 읽어낸다. 무등산 옛길 어느 산골짜기의 물가에서 물봉선을 만난 시인은 꽃의 외관과 속성을 그리면서 그 안에 자연스럽게 시인의 내면의식을 들여앉힌다. 가만있는 듯 보이지만 움직이는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시인은 세상의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씻고 자연의 순수함을 닮아가고자 한다. 자연 속에서 적막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적막 속에서 호흡하는 작은 움직임을 발견하는 시인의 시선에서, 우리는 겉으로만 드러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부단히 움직이는 모습 속에 진정한 자아와 순수한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안개비가 내린 무등산 골짜기에서 시인의 눈에 들어온 물봉선은 이파리 붉은 혓바닥이 촉촉하게 물기를 적시고 있다. 시인은 물봉선을 단순히 자연물로만 보지 않고, “계곡물 졸졸대며 유선(乳腺) 타고 오르는” 생명체로 인식한다.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 있다”라고 말한 제논의 역설을 뒤집어 본다면, 정지해 있는 듯 보이는 물봉선도 시인의 눈에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고요를 깨는 작은 움직임을 “한낮의 고요 속으로 고요가 되는 순수”로 인식하는, 다소 역설적인 표현에서 우리는 자연의 순수함을 내면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시인의 고매한 품성을 읽을 수 있다. 한낮에 시인이 발견한 기쁨은 고요한 정경 속에서 고요를 흔드는 작은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골짜기에 핀 물봉선을 단순히 거기에 피어 있는 자연 사물로만 보지 않고, “안개비 한 잎 적셔 다물지 않”는 모습이나 “계곡물 졸졸대며 乳腺 타고 오르는” 모습으로 포착해내는 것에서, 보이는 것에만 익숙해져 진정한 내면의 모습을 미처 보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성급함을 반성하게 한다.

 

 고요한 내부에 깃들어있는 몸짓 

 정중동(靜中動)의 세계는 한국 무용에서의 정지동작과 닮아 있다. 한국 춤은 느린 동작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듯하지만 춤이 끝날 때까지 한순간의 멈춤도 없다. 때로 동작이 멈춘 듯이 보이지만, 정지한 것이 아니라, 속도를 극단적으로 줄인 것이며, 춤꾼은 여전히 움직이는 가락에 몸을 싣고 있는 것이라 한다. 움직임과 머무름이 공존하는 형태 속에서 감정을 억제해 절제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김영재 시인의 시에서도 정지되어 고요한 시간, 그러나 고요함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다른 것을 향하는 몸짓이 깃들어 있다. 김영재 시인은 물봉선을 보면서 그것이 거기에 존재하는, 그리고 존재해가는 과정을 읽어내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노자의 말처럼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생겨나게 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성립시켜 주며 길고 짧음은 서로 모양을 만들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를 분명하게 하고,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는 서로를 조화시켜주며,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르게 한다.” 김영재 시인의 시는 이처럼 사물의 외면적인 모습을 넘어서서 그 본질적이고 내면적인 세계를 포착하려는 시인의 예리한 통찰력과 사유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상(相, 고정관념, 비교 분별한 상대적인 생각)에 집착하지 않고 본래 모습 그대로 흔들리지 마라”고 한 ‘금강경’의 구절은 사물을 깊이 있는 눈빛으로 읽어내는 시인의 시적 성취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고요 속에서 무상(無上)의 정각(正覺)을 얻는다”는 적연묘각(寂然妙覺)의 의미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거기 있음’에 대한 인식

 시인이 시적 대상을 응시하면서 맨 처음 느끼는 감정은 ‘거기 있음’이라는 인식일 것이다. 때때로 그것은 ‘동무가 없어’에서처럼 부재이기까지 하다. 그러면 어떻게 시적 오브제는 시인에게 오는 것일까. 사르트르가 ‘구토’에서 묘사한 ‘마로니에 뿌리’에서 그 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마로니에 뿌리는 바로 내 의자 아래 땅 속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그것이 뿌리라는 것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했다. 어휘는 사라지고 그리고 언어와 함께 사물의 의미도, 언어의 사용양식도, 인간이 그 사물의 표면에 자취를 감춰놓는 연약한 기호도 사라져 버렸다. (중략) 만일 누가 존재함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며, 사물의 본질을 변하게 하지 않고 밖으로부터 와서 사물에 부과되는 공허한 형태일 뿐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갑자기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대낮처럼 밝았다.”

 이 글은 시적 대상이 어떻게 스스로의 껍질을 벗고, 단순히 응시의 대상에서 존재의 대상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마로니에의 뿌리는 단순히 거기에 있음으로 인해 스스로를 내보이는 “있음”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이렇게 시적 오브제는 김영재 시인에게 나타난다. 진정한 의미에서 묘사로서의 시는 존재를 은폐하거나, 부재의 허위를 증명해야 한다. 그것은 외관이 속성이나 실체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재 시인의 시에는 이렇듯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를 되묻게 하고 내면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순수함과 열정이 있다. 시적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응시는 과거와 현재, 세계와 내면을 연결하고 자연과의 결속을 유도하며, 존재의 근원을 묻고 또 묻는 과정으로까지 이어진다. 대상을 통해 만나는 내면의 깊이와 사유의 언어들이 단시조의 미학에 오롯이 담겨 적막을 깨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송희<시인, 문학박사, 무등지성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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