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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향연]<54> 호미 바바 `문화의 위치’ 
문화적 저항이 전복의 계기로
김경례
기사 게재일 : 2014-02-17 06:00:00

 이번 칼럼에서는 에드워드 사이드, 프란츠 파농에 이어 또 한 명의 탈식민주의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는 호미 바바를 소개하고자 한다.

 호미 바바(Homi K. Bhabha, 1949~)는 인도 출신의 미국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문화비평가이기도 하다. 바바도 사이드나 파농처럼 1세계 백인 지배집단과 3세계 유색인종 피지배집단 사이의 경계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뭄바이에서 태어난 파시(Parsi)교도인데, 파시교는 조로아스터교의 일파로 고대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인도의 소수파 종교이다. 파시교도들은 인도의 대표적 종교인 힌두교 풍습을 존중하면서도 자체의 종교적·인종적 특색을 유지하면서 인도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파시교의 영향을 받은 바바의 성장과정과 문화적 경험은 그의 주요 개념인 ‘혼종성(hybridity)’의 특색을 갖는 것이었다. 혼종성이란 일종의 문화적 잡종으로서, ‘차이’를 바탕으로 하나의 동일성이나 총체성으로 포섭되거나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끊임없이 경합하고 협상하는 지속적인 과정을 말한다.

 

 혼종성(hybridity)의 문화 정치

 

 바바는 피식민지국의 정치적 해방이나 식민국이나 피식민국 내부의 민족주의적 부르주아지들이 자행하는 경제적 착취의 문제, 불평등을 해소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해 나가는 문제 등에 대한 관심 보다는 탈구조주의적 사유체계에 기반한 문화적 차이의 문제에 집중한다. 그가 정치경제적 문제보다는 문화적 차이의 문제에 집중한 것은 파농에게는 알제리의 독립 쟁취가, 사이드에게는 팔레스타인의 자치권과 독립이라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정치적 목표가 있었던 반면 인도는 이미 독립을 쟁취한 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의 탈식민 문화론을 전개해 나가는 과정에서 바바는 라캉은 물론, 데리다·푸코·바르트 등의 이론적 논의들을 끌어들이는데, 소위 탈구조주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서 문화란 단지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과 같은 문화적 텍스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교육·이데올로기·의식주 형식·정치경제 일반 등을 포괄하는 인간의 ‘삶의 방식’ 전반으로 확장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경제적 구조를 이해하고 바꾸는 노력보다 언어·담론 등을 매개로 의미화 되고 형성되는 주체와 객관현실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려는 이론과 실천이 더 중요시되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탈구조주의에서 문화는 언어·담론 등에 의해 매개되며 정신세계와 물질세계를 연결하는 삶의 방식 그 자체이고, 사회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제도나 정책, 시스템의 변화보다는 주체와 삶의 방식 자체의 변화, 즉 새로운 문화형식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탈식민주의 사상가 호미 바바

 호미 바바의 문화이론이 갖는 독특성은 다른 탈식민 사상가들처럼 1세계/3세계, 백인/ 흑인, 지배/피지배라는 이분법적 대당을 부정하지만 이 관계에서 일방적인 착취나 억압, 또는 통일된 저항노선이 설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점이다.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서구의 식민담론이 피식민 주체들에게 일방적으로 투사되지 않으며 피식민 주체들 역시 식민담론을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의 가능성을 지닌 장으로 전유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호미 바바의 문화론은 ‘혼종성’, ‘양가성’, ‘흉내내기’라는 개념으로 집약되는데, 국가 간 뿐만 아니라 한 국가 내부에서도 순수하고 단일한 문화는 있을 수 없으며, 문화적 정체성 역시 백지상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혼종성을 갖는다. 지배자는 피지배자에게 비슷해지기를 요구하지만 자신들의 우월성과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결코 완전히 똑같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피지배자 또한 지배담론이나 문화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문화와 이질적인 차이를 보이며 문화적 혼종성을 생산한다.

 백인 식민 지배자는 피식민지인에 대한 지배욕망을 갖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피식민지인에게 언제든 공격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동시에 갖는다. 이런 점에서 정체성은 ‘양가성’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안정되고 견고한 것이 아니며 문화의 의미와 상징들은 근원적인 통일성이나 고정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바바는 자아/타자, 주인/노예, 1세계/3세계, 자국문화/타문화 간의 구분이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제3의 공간’, ‘경계선’, ‘사이-내 공간(in-between space)’을 상정한다. 바바의 혼종성과 양가성 개념에 대한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인종적 순수성에 기반한 인종차별주의 담론이나 순수한 민족문화를 상정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한편 호미 바바는 피식민지인들의 반식민 저항의 가능성을 상징적 저항인 ‘흉내내기(mimicry)’를 통해 설명한다. 그는 피식민지인의 흉내내기 속에 이미 저항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본다. 즉 흉내내기는 지배자의 권위를 위협하고 제국주의의 견고함을 손상시킬 수 있는 정치적 무기라고 보는 것이다. 피지배자들은 지배자의 문화를 수용하지만 동시에 이를 전복시켜 지배문화를 조롱하고 잡종화함으로써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역전될 수 있으며 훈육과 순응의 대상이었던 피지배자들은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배-피지배’ 넘어 제3공간 상정

 

 결론적으로 바바는 한 민족 또는 국가의 정체성과 문화는 항상 변화하는 잡종의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런 잡종의 상태는 긴장과 양가성이 존재하는 역동적인 공간이라고 파악한다. 따라서 현재 ‘문화의 위치’란 바로 이러한 혼종성 과정이 생산되는 사이-내 공간, 제3의 공간인 것이다. 바바의 탈식민적인 비판 담론에서는 심리적, 사회적으로 부여된 피식민인의 타자성을 부인하거나 지양하지 않는다. 또한 지배문화의 수용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타자성과 지배문화를 전유하고 비트는 방식으로 주체(지배자)를 조롱하고 지배문화를 변화시키는 저항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하지만 피식민 주체의 문화적 혼종성 생산이 이론을 넘어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능한 것인지, 언어나 담론을 통한 상징적, 문화적 저항이 실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나 파급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많다. 혼종성이나 양가성을 통한 이질적인 문화의 생산, 문화적 저항이 사회적 전복의 계기로 이어질 수 있을지, 아니면 지배권력의 억압과 착취에 면역성을 부여하는 도구로 전락할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자는 다문화주의 전략이 많은 경우 지배문화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더욱 정확하게는 지배 권력이 허용 가능한 한도 내에서만 소수 문화를 인정하면서 결국은 지배문화로의 통합과 포섭을 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또한 피지배 주체가 지배문화를 비틀고 그것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지배문화를 내면화하여 자기검열과 복종의 기제로 작동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호미 바바의 혼종성을 통한 문화정치가 담론적 실천을 넘어 현실적 전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분열성, 불안정성, 미결정성으로 특징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에 대한 고려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언어, 상징, 담론투쟁 만큼이나 권력의 작동 방식이나 권력관계의 배치를 바꾸기 위한 현실 정치에의 참여와 사회운동이 중요한 이유이다.

김경례<`무등지성’ 운영위원, 전남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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