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도 아우르지 못하면서 아시아 품을 수 있나?

▲ 아시아문화전당 조감도.

 사람이 사는 데 공간은 퍽이나 중요하다. 내가 어느 한 사람의 삶을 내 나름대로 알고자 했을 때, 그가 사는 곳에 가 보는 것 이상으로 정확한 것이 없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그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한다 해도 물리적으로 집 구조가 가진 공간의 규정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어 보였다. 꽃과 나무가 있는 단독주택, 나아가 생활공간 주변에 숲과 강, 바다와 산이 있는 사람의 마음과 행동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 많은 차이가 나 보였다.

 몽골 초원에 사는 사람은 눈 모양이 쫘악 째져서 가느다랗기 이를 데 없는데, 그이들 중 어떤 이는 시력이 6.0까지 나온다는 얘길 들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유전적으로도 그렇거니와 늘 말을 몰고 먼 데 있는 초지를 찾아야하기 때문에 자주 눈 위에 손을 얻고 먼 곳을 주시하며 눈의 쓰임새를 갈고 다듬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아파트에 사는 사람의 눈은 대부분 놀란 토끼 눈처럼 둥그렇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멀리 있는 것을 볼 필요가 없다. 그들이 하늘의 별과 먼 산을 바라보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늘 불과 몇 백 미터 안팎의 대상에만 시선을 두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은 거의 책상 앞에 놓인 인터넷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일을 하고, 손바닥 만한 핸드폰 글자를 들여다보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인다. 내가 어렸을 때 친구들 두 시력 1.5는 흔했었는데, 요즘 1.2면 무척 좋은 편이라고 들었다.



 광주 직장 그만 두고 강진살이 5년째

 

 나는 시인과 화가들의 작업공간에 가 볼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 그가 만든 구조, 작업실에 꽂힌 책, 집기, 놓여있는 소품들, 정리정돈 상태와 그 집주인의 성격은 거의 일치했다. 시인의 경우 그의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고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관심사는 무엇이었는지, 색이 바래지 않은 책들로 봐서 그의 현재도 짐작해볼 수 있었다. 어떤 이의 방에는 한번 읽고 꽂아놓은 먼지 낀 책들이 빽빽했었고, 어떤 이의 공간은 한결 물성들을 가까이 두고 있어 보였는데, 유화의 파라핀향이나 색깔들, 널려있는 물건들이 건네주는 이야기들이 그랬다. 때로 곰팡이 냄새가 나거나 향기가 풍기기도 했다.

 십여 년 전,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크게 아픈 뒤로 나는 그동안 잊고 지내왔던 내 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 무렵 나는 3개월간의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도 있는데, 그 핵심은 환자 스스로 병의 원인을 찾아내서 스스로 치료하는 것이었다. 같은 직장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한 형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이제 남의 걱정 그만 좀 하고 자네 몸이나 잘 추스르소’

 그 말이 맞았다. 그때 나는 온몸의 신경이 무화(無化) 되어서 말을 심하게 더듬었는데, 친구들과 모여앉아 있을 때, 그들이 나누는 대화중에 끼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생각과 달리 내 뜻대로 말을 하지 못할 때의 답답함이란 이루 형언하기 곤란했다. 그 궁극의 문제는 바로 나였다. 관념 덩어리로서의 내가 아닌 먹고 숨 쉬고 식구들과 살결을 맞대고 사는 바로 내 몸이었다.

 이래저래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에 온 지 5년째다.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자연과의 친화다. 추위와 더위에 민감하고, 새와 차, 개 짖는 소리, 꽃과 나무를 보고 만질 수 있고, 살결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을 시시때때로 달리 느낄 수 있는 등속이 그것이다.

 자연스레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과 더불어 지낼 수밖에 없는데(그렇다고 내가 가난하고 힘들지 않은 게 아니라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자위할 뿐이다), 시시때때로 홀연 지나간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내 몸이 살고 있는 현재가 겹쳐진다.

 끄떡하면 나는 ‘예전에 내가 본…’이란 식의 말이 튀어나오는데, 친구들은 이 말을 정말 싫어한다. 그들은 내게 말했다. ‘옛날 생각 백날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니 앞으로 너나 잘 먹고 살 궁리를 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말일 뿐, 누구에게나 지나간 일들은 단지 시간이 달라지면서 달리 생각할 수 있을 뿐, 있었던 일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각설하고.

 몸 아닌 관념의 틀 속 광주·전남은 남남

 

 광주에서는 비엔날레를 하고, 문화도시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지만, 그 가까운 전남은 너무 다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정은 좀 다르지만, 민주화의 부분에서도 광주는 ‘성지’로 불리고 있지만, 전남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다른 건 놔두고 갈수록 중요해지는 문화부분만 보자. 비엔날레를 하고, 문화도시를 하느라 들어가는 엄청난 돈과 인력과 행정력에 비하면 전남은 너무 초라하고 서글프다.

 광주를 전남과 떼어놓을 수 있는가? 광주는 일제 강점기만 해도 목포보다 작았고, 80년도엔 불과 인구가 80만 명에 못 미쳤다. 지금 광주 인구는 150만 명인데, 그이들 대부분이 전남 출신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몸이 아닌 관념의 틀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좋아해서 광주와 전남이 아주 먼 남남이다.

 강진에서 광주까지는 승용차로 불과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분당과 일산에서 광화문까지도 엇비슷하다. 그런데 서울과 광주, 일산에 사는 누구와 강진에 사는 나를 비교해보면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사람들이 말로는 벼라 별 입에 발린 미사어구들을 늘어놓지만, 광주에서의 일은 바로 그 이웃지역에 파급되지 않거나 단절되어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이것을 문화라고 얘기할 수 있는가?

 사업가, 정치인, 직장인, 자영업자들 말고 문화의 도시를 만들겠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몸·실제·물질 같은 것들을 재껴두고 어디서 주워들은 남의 말이나 행동을 따오는 습성 때문이다. 제 태어난 터전도 아우르지 못하면서 무슨 놈의 아시아를 품겠다는 건지. 몸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좋겠다.

윤정현



윤정현은 강진 출신으로 80년부터 30년간 광주에서 살다가 귀향해, 3년째 강진아트홀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시인이며, 광주비엔날레에서 일했고, 지금은 `잘 살기’를 꿈꾸는 미학에세이를 쓰며 여러 가지 방식의 지역활동을 하고 있다. `명발당’은 필자가 기거하고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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