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의 성장을 위한 조건

▲ 영화 `얼굴없는 미녀’ 중 한 장면.

 대부분의 종교인과 철학자들은 현세를 고통으로 정의하고 부정하였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화택(火宅)이라 하여 불이 난 집으로 비유하였다. 예수님도 땅에서 추구하는 부와 권력 등으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인류에게 큰 영향을 준 성인들과 철학자들은 개별적 인간을 초월하여 국가와 민족과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류가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왔다. 복잡 다변한 현대 사회에 가까워오면서 보편적 인류의 행복에 대한 이상을 더 이상 꿈꾸지 않게 되고, 이제는 단순히 한 개인의 개별적 안위만을 다루게 되었다. 심리치료는 종교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남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인류 구원세력의 전환의 중심에 프로이트가 있었다.

 

 지혜의 추구에서 욕망의 수용으로

 

 프로이트는 심리치료자이지만 인간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 혹은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은 기존의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이론적 토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과거 인류가 인간의 행복과 성장을 위해 지향했던 방향과 관점에서 뒤돌아서 전혀 반대의 방향을 되돌아보기 시작하였다. 과거 그리스 시대부터 시작했던 신화와 철학이 지향했던 ‘지혜의 추구’에서 ‘욕망의 수용’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는 니체의 아폴론 중심의 문화에서 디오니소스 중심의 문화로의 변화 주장과 일치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지적 광이었던 프로이트는 자신의 학문적 지향점이 니체의 것과 유사하다고 여겨 니체의 저작을 일부러 평생동안 읽지 않았다고 한다.

 심리치료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의 시대에서 현대에 가까워올수록 심리치료자들은 인간에 대한 철학이나 관점은 가볍게 여기기 시작한다. 물론 지금도 상담자들이 배워야할 보편적 상담이론으로 인정받기 위한 조건 중 하나로 인간에 대한 관점이 있는가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이론과 심리치료자, 상담가들은 인간을 현실에 적응시키는 것에만 열심이고 인류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이 속한 세계가 행복하면 이 세계가 고통에 빠져 있어도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는 순진한 아이와 같은 모습이다.

 가끔 종교들이 자신들의 교리를 ‘이 세상 끝까지’ 전달해야 한다는 신념을 들으면서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공격적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만이 옳다거나, 힘에 의한 일방적 굴복이거나, 마케팅에 의한 시장점유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애와 대화가 전제된다면 현대의 종교인뿐만 아니라 심리치료자에게 훌륭한 덕목이 될 수 있을 만하다. 대승불교에서 극락정토에 산다는 아미타불의 아미타는 무량(無量) 곧 끝이 없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아미타불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지 않으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결심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왜 그는 그러한 불가능해 보이는 뜻을 세웠고, 타인을 먼저 구원하겠다는 의지가 깨달음을 가져오게 하는가? 만일 한 종교인과 심리치료자가 자신에게 찾아 온 한 사람의 고민에만 그치고 인간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고통의 총체를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는 마음에서 이미 종교인과 심리치료자로서 자격이 상실되어버린 것과 같다.

 

 심리치료의 과정

 

 다시 프로이트에서 시작된 심리치료의 관점에서 한 인간의 인격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로 되돌아가보자. 단순히 사회적인 예의, 관습, 규범 등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 의심 없이 확인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한 인간의 인격적 성장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본능, 무의식, 어린이 등을 부정하지 않는데 있다. 우리는 고매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교수라고 하는 사람이 인격이 돌변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과거 여러 종교에서 사용하였던 명상, 유교의 경, 심리학의 내관법 등이 이와 유사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자아를 분리하지 않고 통합하는데 있다. 자신의 욕망, 본능, 감정, 상상 등 기존의 가치나 신념에서 부정적인 것으로 거부되었던 것들을 견디면서 지켜보는 데 있다. 기존의 종교에서 사용하던 마음을 다스리던 방법도 사실은 정신분석에서 했던 것과 비슷했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지식 중심의 인격수련방법으로 넘어가면서 내면을 들여다보되 감정과 욕망이 올라오려하면 차단하고 누르는 것을 올바른 방법이라고 착각하면서 수양방법이 그르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신의 인격성장을 위한 첫 방법으로 추천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감정은 인류가 인지기능을 진화시키기 이전에 아주 오랫동안 인류 생존에 기능적 역할을 담당했었다. 감정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무엇이며,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신호역할을 해주었으며, 행동을 하기 위한 신체준비활동과 의사소통 등의 역할도 함께 해주었다. 호나이(Horney)의 자기분석에 나와 있는 한 환자의 사례를 들어보자. 존이라고 하는 그 남자는 어느 날 공연을 보러갔다가 두통을 경험한다. 그는 두통이 단순히 공연이 재미없음으로 인해 생길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두통을 가만히 살펴본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이라는 단어를 우연히 말하면서 자신이 타인의 요구에 복종하려 할 때 두통이 발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후 간부회의에서 똑같이 두통을 경험하고 자신의 의견을 거부한 다른 간부들에 대한 분노와 두통과의 연결성을 깨닫는다.

 무의식의 의식화라는 심리치료의 과정을 어린이 같은 어른, 성과 속이 일체가 된 평상심 등의 다양한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심리치료는 인간이 자신의 인격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동물적 측면을 인식하고 수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이자 인간이자 신이다. 그가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는 그의 깨달음에 따라 달라진다.

정의석<무등지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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