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떠나니 묵정밭·폐가만 늘고

▲ 생일도 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본 동네 풍경. 밭들은 다시마 건조장으로 쓰고 있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개간했던 다랑치 논들은 형체를 알 수 없을만치 묵정밭이 되었다.

 강진이 집이어서 이웃한 해남이나 장흥, 완도 같은 데엘 자주 간다. 완도 생일도도 그 중 한 곳이다. 어렸을 때 시골 이웃집 아짐 댁호가 약산댁이었고, 생일댁은 뒷등이라는 아주 외진 곳에 살았었는데,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분의 고향인 그 섬에 가 볼 생각을 하게 된 건, 소설을 쓰는 선배 형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도시의 삶을 접고 고향으로 살러 간다고 하자, 반가운 한편으로 걱정이 태산이었던 그 형은 넌지시 어렸을 때 자신이 올라가보곤 했던, 섬 가운데에 있는 그 산에 올라보라고 일러줬다.

 

 백운상 정상은 아직도 절경 간직

 

 어느 이른 봄날, 백련사에 사는 젊은 스님과 역시 젊은 보살님과 함께 그 섬에 갔다. 차를 갖고 고금·약산을 지나 당목항에서 배를 타고 30분 만에 선착장에 가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 마음속에서는 너무 먼 곳. 길섶엔 생강나무 꽃이 피어 있었고, 얼레지와 바람꽃도 있었고, 고사리를 꺾는 할머니들이 계곡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학서암이란 절에 다다랐을 시간에는 안개가 자욱했었는데, 암자 귀퉁이 스님이 내놓은 의자에 앉아 앞 바다를 바라보자, 바로 눈앞의 한 섬이 꼭 먼데서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고래의 등만 같았다.

 백운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얼마나 소담스러운지. 15분 정도 걸렸는데, 거기에서 바라본 파노라마란…. 서 있는 곳을 빙 둘러서 고금, 약산, 신지, 완도, 금일 같은 섬들과 멀리 소안, 청산, 보길, 대모, 소모, 횡간 같은 작은 섬들이 아스라이 펼쳐졌다.

 저 먼 곳은 천관산. 그 아래 동학농민전쟁 최후의 병사들이 독 안에 든 쥐처럼 몸을 숨기고 있다가 어린 소년의 돛단배를 타고 밤마다 이곳 여러 섬들로 피신했던 곳. 저기 보이는 저 넙도는 선배 형의 소설 ‘곡두운동회’(임철우)에 나온, 한국전쟁 때 완도읍내에서 사람들이 처형됐을 때 시신이 떠다니던 곳. 완도는 28살의 어린 나이로 강진 병영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완도민란의 우두머리 허사겸의 묘가 있는 섬. 두륜산 오심재는 그런 반란의 주모자들이 어느 겨울 한철 내내 밤마다 고개를 넘었던 곳….

 그런 생일도는 지금은 전복과 다시마의 고장이 되어 있다. 전복 값이 좋으니 거기 사는 사람들은 집중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외의 바다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예전에 일궜던 섬 안의 작은 농토들은 이즈음 개체수가 늘어난 멧돼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시마를 말리는 건조장으로 쓰이고 있고, 산 속 깊은 계곡을 타고 올라가며 개간해서 농사를 지어먹었던 계단식 밭들은 이제 겨우 정상에서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묵정밭이 되어 있었다.

 뿐인가? 동네들은 비어 있고, 한 번 떠나간 사람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그 빈 집들의 녹슨 양철지붕들이란. 섬을 빙 둘러 있는 마을들과 골목,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 보니, 오래 전에 이사 간 집들은 물론이려니와 아주 최근에 그 집에 마지막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고이 싸진 이불이며 금방이라도 주인이 나타나서 입을 것만 같은 옷가지들, 정지간에 쌓여있는 그릇들, 반듯한 바닥, 뒷간, 마굿간, 나무지게와 호미와 헤진 대바구니들….

 어느 집 후미진 벽장에는 한문서책들이 곧 썩어가는 채로 쌓여 있었는데, 중국 당시들을 서툰 붓글씨로 필사해서 만든 시집들과 내로라하는 경서들도 있었고, 편지나 사진첩, 관혼상제 때의 기록들도 습한 먼지 속에 머지않아 사라져 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섬마을 풍경

 

 대부분의 동네들은 바다를 향하고 있었는데, 가옥의 구조와 돌담들은 빠르게 없어지고 있었다. 세월은 유수 같은 것. 나는 매년 몇 차례씩 그 섬에 가곤 하는데, 그 때마다 섬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같은 완도군에서 청산도는 없는 돌담도 군에서 돈을 줘 새로 쌓고 있는데, 생일도에서는 비어서 오래 된 집들을 포클레인으로 밀어 그저 몇 푼짜리 마늘밭 같은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작년 여름에는 강진과 해남의 나무를 갖고 전시(‘南道의 美_나무’·강진아트홀)를 꾸민 적이 있는데, 그 중에 이 섬의 한 집 용마루도 전시품목 중 하나였다. 가난한 살림들이어서 변변한 집을 짓지 못하고 살았는데, 400년 전 한 부잣집에서 반듯하게 큰 집을 지을 때, 그 섬의 깊은 산에서 베 온 나무였음이 분명한 7m짜리 소나무로 된 그것을 얻어 집을 지었다. 그 집 역시 옛 집 곁에 새로 양옥을 짓고 구간은 사용하지 않아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는데, 재작년 큰 태풍에 그만 지붕이 폭삭 내려앉아버렸고, 그래서 썩어 가던 것이었다.

 섬 집마다 토방마루에서는 가까운 개펄이 눈앞에 펼쳐졌다. 무더운 여름날이거나 추운 겨울 어느 날, 동네 아이들은 동구 밖 사장나무 아래에서 놀다 지쳐, 바다에 나간 엄마를 기다렸을 터. 물때가 달랐으므로 엄마가 돌아와 밥을 지을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배고픔에 지쳐 바다에 나간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잠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변하고 사라져 가는 것이 어디 이 뿐이랴. 사람이 쓰던 물건의 변화는 반드시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 즉 생활환경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섬마을들을 가만 살펴보고 다니노라면 불과 몇 십 년 전의 마을 풍경이 영화처럼 선명하게 떠올랐었는데, 그런 삶의 흔적은 지금 이 시간, 바쁜 우리들의 일상에서 하루가 달리 빠르게 잊혀져가고 있다.

윤정현



윤정현은 강진 출신으로 80년부터 30년간 광주에서 살다가 귀향해, 3년째 강진아트홀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시인이며, 광주비엔날레에서 일했고, 지금은 `잘 살기’를 꿈꾸는 미학에세이를 쓰며 여러 가지 방식의 지역활동을 하고 있다. `명발당’은 필자가 기거하고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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