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잘못된 앎으로부터 사람 자유롭게 해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4월18일 오후인데, 밖엔 비가 내린다.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하다. 한편으로는 화가 난다. 대형사고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개인으로서 무력한 느낌과 자괴감이 가슴을 억누른다. 한 사상가가 말했다. 건강하지 못한 사회 안에서는 어떤 개인도 행복하게 살 수 없다. 이 말은 바로 현재의 상황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사회적 대형사고에 대한 여러 원인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원인들 중에서 사람의 나태함과 맹목적인 행동에 기인한 원인이 가장 심각한 원인이 될 수 있다. 이 나태함과 맹목적인 행동은 필자 자신을 포함한 각 개인의 진지한 대화가 상실된 소소한 일상에서 시작한다. 평소 우리는 사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문제 해결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생각의 습관에 따라서 혹은 자신에게 유익한 쪽으로 판단하는 경향을 갖는다. 즉 적당히 말하며 살고 있다. 일상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게으르고 나태한 판단의 경향성은 문제를 옳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약화시키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이렇게 보면 대형사고의 이면에는 그 문제에 관련된 사람들의 대화가 상실된 곳에서 싹트는 부족한 판단력이 그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다,

 

 진정한 대화의 힘-틈새와 우상 정리

 

 진정한 대화는 게으르고 잘못된 앎으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젊은이들의 생각과 의식을 혼란시키고 그래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소크라테스에게 행해졌던 비난은 대화의 속성을 잘 말해준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머릿속에 담긴 수많은 확신과 이념들이 대화를 통해서 바꿔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생각 속에 수없이 많은 ‘틈새’들이 있을 수 있다. 베이컨의 표현대로 ‘우상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틈새와 우상들이 실제상황에서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대화 노력은 이러한 틈새와 우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대화는 생각들과 생각들의 만남이며, 서로의 생각들이 상호 교제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대화는 일정한 규칙과 룰을 갖는다. 즉 대화는 여러 생각들이 무질서하게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사유법이다. 대화는 직관이 아닌 개념적이므로 설명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유이기 때문이다.

 대화를 그 근원적 의미에서 다뤄보자. 대화 개념은 라틴어의 ‘discurrere’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여기저기로 걷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는 사람이 여기저기로 거니는 것을 의미하는 데서 나아가, 생각이 여기저기로 이동하는 것을 뜻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 대화는 “서로 말하며 교제하는 일”, “대담하는 일” 그리고 “한담하는 일” 등의 넓은 의미로 쓰여진다. 우리는 이를 괴테(Goethe)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나르시스는 나와 함께 서로 말하기 시작했다. 30분도 채 흐르기 전에 대화는 매우 흥미로워져 우리는 더 이상 춤을 계속할 수 없었다. …… 다른 날 저녁 우리는 그 대화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옳다는 주장의 정당성 검토 사유과정

 

 사람과의 대화는 춤보다 더 재미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논증의 면에 치중한다. 대화는 자유분방한 형식과 내용을 갖지만, 대화의 성질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화의 논증적 요소이다. 대화가 논증적인 이유는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테제나 입장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근거나 이유들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화는 옳다는 주장들에 대한 그의 정당성을 검토하는 사유과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대화의 논증성의 근원을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대화는 비판적 검토가 핵심이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비판적 반성과 타인과의 생각의 교환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스스로 사유하는 대화와 타인과의 대화 교제를 통해서 타당한 보편성, 참된 진리 그리고 올바른 정의(定義)를 추구해 나간다. 스스로 확신을 갖게 하는 이러한 이론들은 곧 우리의 행동을 위한 판단력이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이성은 대화에 의해 자기실현을 추구하며 공동의 논의를 통해서 공동지성을 만들어간다. 이성적 대화의 방식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 확신하는 자기이해와 억압과 강요 없는 상호이해, 나아가서 갈등문제에 대한 논증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으며 또한 도덕적으로 의무가 되는 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척도가 되는 점을 찾을 수 있다.

 

 두 차원에서의 대화의 공간



 대화의 공간은 두 차원에서 펼쳐진다. 자신의 내면적 대화의 지평과 타인과의 공동지성의 탐구지평이 그것이다. 자신과의 내면의 대화는 어떤 문제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과 응답의 장(場)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질문과 응답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이나 결정한 태도에 대하여 그것이 주어진 상황과 문맥 안에서 논증적으로 올바른 것인가를 검토해 보는 일이다. 예를 들면 자신이 어떤 주장을 하는데, 그 주장이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타당한 주장인지? 나아가서 본인이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주장을 여전히 지지할 수 있는지? 이렇게 주장의 의미를 꼼꼼히 따져보는 일이다.

 우리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정당성을 따져보고 객관적 입장에서 자기주장의 논증성을 살펴봄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이끌어갈 수 있는 확신을 갖는다. 이러한 확신은 올바른 태도 표명과 의미 있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일에 대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것에 근거해서 행동을 하게 된다. 확신에 찬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평소에 확신을 가진 행동들을 하게 되면 우리는 위급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에도 제대로 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확신에 찬 행동과 제대로 된 판단력은 서로 얽혀 있다. 그러므로 자신과의 내면의 대화는 자기이해에 도달하게 하고 이를 통해서 확신에 찬 행동을 위한 판단력을 갖게 한다.

 대화의 또 다른 축인 타인과 공동지성의 대화지평은 좀 더 복잡한 구조를 갖는다. 간단히 언급하면 먼저 양자의 자기이해의 언어 사용이 전제되어야 하며(서로가 자신들이 이해한 자신의 생각을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경청이라는 또 다른 차원을 필요로 한다. 상호 대화가 성공하려면, 즉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경청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흔히 경청을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는 것이라고 이해하는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한 경청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를 그 밑바탕으로 해야 한다. 즉 대화의 상대를 존중해야 제대로 된 경청이 이뤄진다는 뜻이다. 경청을 통해서 상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자기이해로 연결된다. 경청을 통해 얻게 된 다른 사람의 생각과 주장은 내가 스스로의 대화에서 보지 못한 다른 면을 알게 해준다. 즉 내 생각의 한계가 넓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의 대화를 통해서 자기이해의 장(場)이 확장된다. 이러한 각자 자기이해의 장의 확장을 통해서 우리는 공동지성의 토대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한 실천적 대화는 자신의 사유 지평을 넓혀주고 타인과 함께 의미 있는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보다 넓게 그리고 깊게 볼 수 있는, 그래서 분명하고 확신에 찬 나의 생각은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그 상황이 요구하는 일에 맞는 태도를 취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타인과 의미 있는 세계에 대한 공감과 합의를 통해서 의미를 인식한 개인 생각은 사회의 가치를 창출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선장이, 침몰하는 배 안에 다른 승객을 남겨두고 먼저 떠나는 일과 같은 유형의 대화가 상실된 일들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박해용<전남대 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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