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골살이의 겨울과 봄은 죽음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많았다. 이즈음 어느 시골이나 마찬가지지만, 내가 사는 시골 사람의 1/3이 호적상으로 65살 이상 나이 드신 노인들이다. 그 밖의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읍내나 면소재지 같이 상대적으로 번화한 곳에서 많이 살기 때문에 한갓진 산골 동네에서는 아이들 웃음소리를 들어보기가 정말 힘들다. 녹음이 우거진 이즈음 뻐꾸기나 소쩍새·산꿩 울음소리보다 더 귀한 게 아이울음 소리다. 하여 죽음은 일상적인 일. 나날이 이어지는 줄초상도 초상이려니와 그에 뒤이은 제사 또한 만만치 않다.

 나는 시조로부터 28대손인데, 1대부터 27대, 그러니까 맨 위 선조로부터 내 바로 위 아버지까지의 산소가 모두 내가 살고 있는 동네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문중 시제를 모른 척 할 수 없는 처지인데, 모두 느끼고 있는 사실이지만 요즘 같은 현대생활에서 시제라는 그 고리타분하기 그지없는 행위에 한발을 디딜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이 때로 비감하게 생각될 때가 참 많다.

 

 망자와 산자들의 만남의 날

 

 내가 도시에서 살다가 이곳에 온 지 딱 5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날이 변해가는 시제 지내는 풍속은 해마다 격세지감이다. 예전에는 떠들썩하기 이를 데 없는 잔치와 다를 바 없었지만 요즈음은 잔치는커녕 초라하다 못해 소소하기 이를 데가 없다. 매번 참석하시는 종중 분들은 대부분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노인들일 수밖에 없는데, 그분들이 해마다 몇 분씩 돌아가시는 중이니, 시제 모시는 날 모여서 참석자의 면면을 헤아리는 일이 삶과 죽음을 확인하는 일이나 진배없다.

 성성한 젊은 축들은 시제 같은 데엔 아예 관심이 없다. 그럴 수밖에. 어쩌다 생각이 나서 와 보면, 꼬장꼬장하기 이를 데 없는 시골 노인네들의 잔소리를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 대면천지에 누가 그런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들을 듣고 있는다는 말인가 말이다.

 해서 나는 생각해봤다. 이 시제라는 것도, 선조들 묘지에 벌초를 하거나 심지어 제사를 지내는 것도 이제 우리 세대에나 보편적인 일상일 뿐, 조금만 더 세월이 지나면 아주 희귀한 풍경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그래서인지 나는 ‘형식과 내용은 상응한다’는 전제에 빗대서 이런 생각도 해봤다.

 며칠 전, 할아버지 제삿날 형제들과 모여 상을 물리고 난 뒤였다. 이제 집안에서 지내는 제사를 그만 지내고 산소에서 지내는 묘제로 하자고 제안했다. 제삿날이 평일인데 딱히 제사를 그날 지내라는 법도 없으니 제삿날이 낀 주말에 경치 좋은 묘소에 나들이를 가자고. 운동화에 케쥬얼복을 입고 왔으면 했다. 산과 들이 있고 숲이 우거진 산소에 가서 간소한 상을 차려놓고 예를 올리고 난 뒤 자손들끼리 나들이를 온 것처럼 즐기자고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제삿날이면 고생하기 일쑤인 안사람들의 번거로움을 용인하고 싶지 않아서다. 어느 집안이나 그렇겠지만 제삿날이면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간에 여자들은 부엌에서 부산하게 음식을 마련하는 반면, 또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간에 남자들은 천연덕스럽게 술상 앞에 모여앉아 주로 정치 이야기를 비롯한 뜬구름 잡기 일쑤인 세상사를 시시콜콜 해댄다. 여자들이 못마땅한 건 당연한 일. 나는 그렇지 않았으면 했다.

 제사가 망자들과 산자들이 함께 하는 만남의 날이되, 되도록 격식에 치우치지 않고 내용에 충실하면 얼마나 좋을까“ 상차림도 대부분 나물과 마른 음식 같은 망자들을 위한 것이 대부분인데, 와인이면 어떻고 생선회면 어떤가도 생각해봤다. 그렇듯 되도록 맛있고 간편한 것이어서 예를 갖추고 난 뒤에 찾아온 모두가 둘러앉아 맛있게 나눠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으면 좋겠어서다.

 

 놀이를 통해 죽음을 느끼다

 

 차마 입밖에 꺼내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나는 차례의 절차도 허락만 해준다면 내 나름대로의 새로운 것을 만들어 쓰고 싶다고도 생각해봤다. 유가(儒家)들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힘주어 말하지만, 나는 주자학에 가례(家禮)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극히 최근에야 전해 들었다. 그렇다면 예전의 것을 이어받아 새로운 것을 만드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시도해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시제에 오시는 노인들 중에서도 때로는 꽉 막힌 분들과는 달리 ‘남의 집안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는다는 말로부터 시작해 제사와 관련한 세상 사는 요량을 조리 있게 말해주는 분도 계셨다. ‘법도와 절차라는 것은 형편에 맞게 만들어서 쓰면 되는 것’이라고도 하셨다. 나도 그렇게 이즈음 나와 우리들의 처지에 맞게 다시 만들어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그렇게 인간사 관혼상제 중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제사가 그저 번거로운 일거리가 아니라, 일가친척 형제자매들이 오랜만에 다정하게 모두 모여 즐겁게 노는 하루 야유회 같은 놀이였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동네 집들과 아주 가까운 곳에 산소들이 많았고,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그 위에 올라가 놀거나 심지어 미끄럼을 타기도 했다. 그래도 까다로운 분들과 달리 어떤 어른은 크게 나무라지 않은 분도 있었다.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서 무슨 경망스러운 짓이냐고 나무래도 그분은 ‘제사상 위에 손자가 타고 올라가 엎어버려도 아무렇지도 않단다’고 하시기까지 했다.

 그분은 그렇게 놀이를 통해 죽음을 느끼길 바랬었던 것 같다.

윤정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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