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곡미끄럼바위.

 사진은 지난 봄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 가 본, 강진 금곡에 있는 미끄럼바위다. 그곳은 예전에 읍이나 군동, 칠량, 대구, 마량 사람들이 광주나 서울 같은 대처에 갈 때 넘어가는 까치내재라는 고갯길 한가운데에 있다.

 고개는 어디나 숨 가쁜 법. 도중에 있는 이곳엔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께서 말하신 ‘선비가 숨어살기 적당한 터는 큰 바위가 좌우에 서 있어서 바깥세상과 구별하는 대문 구실을 해주는 곳이라야 한다’는 지형과 딱 어울리는 곳이다.

 지금 그곳엔 금곡사라는 절이 있는데, 길이 7미터, 넓이 2.5미터 쯤 되는 바위가 있다. 계곡 입구에 비스듬히 놓인 그 한가운데엔 사람들이 미끄럼을 타느라 엉덩이에 닳은 자욱이 사진처럼 깊고 길게 나 있다. 흐르는 폭포가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끄럼을 탔으면 저렇게 바위가 닳아질까?

 

 관행화된 매너리즘에 주목 못받아

 

 하지만 사람들은 그곳에 있는 김삿갓시비나 보물로 지정된 금곡사삼층석탑, 그리고 금곡사 경내에 비해 이것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 계곡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초입에 이것이 있고, 김삿갓의 시비가 있다. 내용은 ‘바위는 두개로 우뚝 섰는데, 물은 합쳐진다'는, 그의 수많은 시편들에 비하자면 그리 특이할 것도 없는 평범한 방랑시다.

 금곡사 경내에 있는 삼층석탑은 백제시대의 양식을 따랐다고 하는데, 솔찍히 말해 석탑 양식에 과문한 나로서는 그다지 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대신 내 감각의 촉수를 더 예민하게 자극 한 게 이것이었다. 내가 이것을 본 날은 이랬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봄날, 날마다 출퇴근하는 내 사무실 건너편에 있는 꽃집 아짐이 내게 말했다. “오늘 점심밥은 같이 금곡사에 가 꽃비를 맞으며 도시락을 먹자”고. 감히 청하지 못했지만 바라던 바라. 점심시간에 차로 5분 걸리는 그곳에 가보니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잎이 마치 눈발 같았다.

 그날이 마침 멀리 완도 섬에서 시집 온 꽃집 아짐의 친정오빠 내외가 여동생이 잘 사나 들르러 온 날이어서, 아짐 내외랑 다섯이서 나무 아래에 자리를 깔고 앉아 삼겹살을 구워먹었다. 식 후 경(食後景)이라. 배를 꺼치려 계곡 안에 들어가 경배를 둘러보려다 본 게 이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 재를 오르내리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쉬었던 사람들의 아이들이나, 읍내나 근동에서 이 계곡 안에 있는 물을 맞으러 온 사람들, 또는 절에 들렀던 사람들의 아이들이 이곳에서 놀았던 흔적이다.

 이곳에 있는 계곡물은 겨울에는 따듯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무더운 한여름이면 인근 사람들의 피서지로 이름난 곳이다. 선비들은 종종 이곳에 들러 탁족(濯足)을 하곤 했다. 그 어른들을 따라온 아이들이 어른들이 물을 맞거나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하릴없는 아이들이 이 바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놀았던 것이다.

 크기와 마모된 상태로 봐서 이것은 천년은 족이 넘었을 것 같았다. 강진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천년 전의 고려청자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그보다 훨씬 더 이전부터 이곳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것에 그리 주목하지 않는 이유는 문화유산을 대하는 우리들의 관행화된 매너리즘 때문인 것 같다. 김삿갓시비와 금곡사삼층석탑에 대한 자세한 안내판이 있고, 사찰 내력이 적힌 안내판도 있지만, 이것에는 그런 안내판이 없으니까 말이다.

 경내의 건물 배치는 예전엔 대웅전에서 절 입구로 들어오는 양쪽의 두 암벽을 바라보도록 되어있을 법 했는데, 이즈음 전국 어느 절에서나 그렇듯이 지나친 불사, 즉 대웅전 앞에 지나치게 큰 건물을 지어버린 탓에 전체적인 경관이 이상하리만치 조화스럽지 못해 보였다.

 

 구경온 학생들이 미끄럼 타는 꿈

 

 문화유물은 설령 그것이 종교적 의미의 그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은 공공재 혹은 지역문화의 성격이 깃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즈음 사찰에서의 그것들은 상당 부분 스님네들의 사적 관점이나 취향이 너무 깊게 배어있는 것만 같다.

 그곳 대웅전 앞마당은 크게 넓히고 높다란 단을 쌓아서 좌우로 굽어 돌아 내려가도록 해놨는데, 돌을 쌓는 방식이나 주변 경관을 고려했을 때 그것은 지나치게 크고 높아 보였다. 또 새로 지은 요사채가 석문(石門)의 절경을 가려버려서 그곳 자체의 승경(勝景)을 종교적 의미로 국한시켜버린 듯 한 것만 같았다.

 미끄럼바위는 그런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천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상상해보자. 이것은 역사 시기 훨씬 이전부터 아이들이 미끄럼을 타던 곳이었을 수도 있고, 어떤 토속적 비의(秘意)가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선 꼭 미끄럼을 타야 한다’던가, ‘미끄럼을 타면 미끄러지듯 일이 술술 풀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날 때마침 근처에 있는 초등학생들이 그곳에 구경 왔었는데, 유심히 지켜봤지만 이곳에서 관심을 갖는 아이들은 물론 인솔해 오셨던 선생님도 그에 대해선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이제 아이들은 이런 것을 보고도 미끄럼을 타려는 욕구를 느끼지 못하고, 이즈음 길 가에 산딸기가 주렁주렁 열려있어도 따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만약 아이들이 이 바위에서 미끄럼을 탄다면, 그런 아이는 한결 명랑, 쾌활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자연과 더 밀착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커나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봤다.

 이것은 내 멋대로의 향토문화유산이다.

윤정현 <시인>



윤정현은 강진 출신으로 80년부터 30년간 광주에서 살다가 귀향해, 3년째 강진아트홀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시인이며, 광주비엔날레에서 일했고, 지금은 `잘 살기’를 꿈꾸는 미학에세이를 쓰며 여러 가지 방식의 지역활동을 하고 있다.

`명발당’은 필자가 기거하고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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