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호 유족들의 단식 농성을 조롱하는 보수 세력의 폭식 시위.<사진출처=참세상>

 이 부박한 시절에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그저 부질없기만 한 것 같다. 대저 말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유용한 도구였으되,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지시하는 것과 의미하는 것 사이의 일치된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즈음 이런 말의 어긋남은 너무나도 극심하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한 화자가 누군가에게 ‘좋아 한다’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 청자가 받아들이기를 원했던 그것과는 달리 받아들이거나 화자가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로 ‘싫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경우 화자와 청자 간에 형성되어 있었거나 기대했던 전통적 의미의 언어적 관계는 단절되고 만다. 언어의 단절은 그것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망의 균열을 의미한다.

 단식의 의미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가장 극단적인 의사표현의 방식이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생을 포기하고서까지 주장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얻고 싶은 그 무언가를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세월호 유족들의 광화문 단식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에 공감하는 사람들 한쪽에서 정반대의 생각을 갖는 별난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른바 ‘폭식투쟁’을 한 것이다.

 

 지시하는 것과 의미하는 것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되,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을 택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지만, 기실 더 한 것은 무관심이다.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갖고 서로가 싸울 때는 상대와 나의 관점을 일치시키려는 의도가 있지만, 그런 차원을 넘어서 서로 싸울 생각조차 없다면 서로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즈음 언론에 회자되는 우리사회의 여러 지표들을 보면 실로 아찔하다. ‘한강의 기적’은 옛 말일 뿐, 지금 한국인 스스로가 판단하는 행복지수와 유엔 기구인 유네스코가 여러 지수들을 대입해서 산출해본 삶의 질은 후진국 수준이다. 우리는 지금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살찐 돼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때 지구촌 여러 나라들 중 수위에 이르렀던 인권지수와 언론자유 지수도 날개가 없이 추락하고 있다. OECD 가입국가중 상위 10%인구가 가진 부의 집중도로 봤을 때 우리는 3위의 부익부 빈익빈의 나라고, 1%를 기준으로 했을 때에는 세계 최고다.

 정치인들이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대부분 그들의 결정권 안에 있는 국가라는 것도 세월호 사건을 겪는 동안 사람들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개념의 아노미상태에 빠져버렸다. 사람들은 이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고 한다.

 연일 언론매체들 통해 전해지는 사건사고들은 도무지 끔찍하기만 해서 이어듣기가 두렵다. 그것들의 최종심급을 관리하는 법체계는 또 어떤가? 내놓고 말을 하진 않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은 검사라는 말을 듣고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들을 기득권의 옹호자들이거나 권력의 충견이라고 생각한다. 기자들을 기레기라 부른다. 공무원은 철밥통, 군인들은 부모형제들에게 걱정을 안겨주는 집단, 남자들은 도둑놈, 어른들은 거짓말쟁이, 심지어 유기농도 사기농….

 지난 봄 이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토로하는 한결같은 얘기가 우울증·무기력증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 이야기가 아니다.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장삼이사 일반국민이 느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반응하는 이들은 사회적 공감능력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예민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굳이 어느 한 부류라고 특이할 것도 없어 보였다.

 정신의학을 전공한 의사들을 중심으로 한 혹자들은 이런 집단적 증후군을 치유할 프로그램이 절실하다고 하고, 실제 안양에서 그것이 진행되고 있기도 하는데, 기실 이런 치유의 과정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솔직히 말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연대·희망 없는 ‘살찐 돼지’들

 

 사정이 이 정도에까지 이르렀으면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사람들이 나서서 공동체의 미래를 제시하는 것이 상식이건만, 이 또한 요령부득이다. 실권을 가진 권력자들의 말은 겉돌고, 언론매체들에서 날이면 날마다 이어지는 사건사고들과 말들의 어긋남은 끝이 없다. 그 사이 우리사회의 씨줄과 날줄은 이루는 구성원들의 안전망은 헤어지고 생활고가 갈수록 심해진다. 사람들 개개인의 일상으로 깊이 파고드는 고통의 실핏줄들은 너무 촘촘하고 질기기만 하다.

 이즈음 지구촌 다른 곳에 비해 대체로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가 중남미 국가들이라는데, 그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사회 구성원들이 외로운 혼자가 아닌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라는 연대의식 내지는 공동체 의식이라고 한다.

 자꾸 해체되어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세계는 민족국가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민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언어체계를 든다. 어느 민족이든 말을 통해 신화와 역사를 공유하고 현대를 살아가며 내일을 전망한다. 우리는 말을 배우기 위해, 말을 잃지 않기 위해, 말을 바로세우기 위해 얼마나 지난한 노력을 기울여 왔던가?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의 공동체 구성원 대다수가 공유하는 가치가 무엇인가. 대체 그것이 어느 한 쪼가리라도 남아있기나 한가? 말들의 어긋남은 서로가 서로에게 섬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시공간에 있어도 서로 다른 꿈을 갖고 있고, 함께 있지만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아니라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끝없는 절망만이 희망을 건져 올릴 수 있는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는데, 언제까지 이럴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윤정현<시인>



윤정현 님은 강진에서 태어나 80년부터 30년간 광주에서 살다가 귀향해, 지금은 강진아트홀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시인이며, 광주비엔날레에서 일했고, 지금은 두루 `잘 살기’를 꿈꾸며 지낸다. `명발당’은 그가 살고 있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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