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도둑을 만드는가?

 - 1948 / 원작 : 루이지 바르톨리니 / 이탈리아 / 96분 / 감독 : 비토리오 데 시카 / 출연 : 람베르토 마지오라니(안토니오 역), 엔조 스타이오라(아들 브루너 역), 리아넬라 카렐(아내 마리아 역)

 2차 대전 후 로마의 서민들은 실업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안토니오는 직업소개소에서 포스터 붙이는 일을 할당 받지만,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전거가 필요하다. 전에 있던 자전거는 생활고로 저당을 잡혔다. 부부는 침대보를 저당 잡혀 마련한 돈으로 자전거를 되찾는다. 직장을 찾은 부부는 새로 잡은 직장 덕분에 희망에 부푼다.

 안토니오는 아들 부르노를 주유소에 내려주고 직장으로 향한다. 업무 첫날, 포스터를 붙이던 사이에 도둑 일당에게 자전거를 도둑맞는다. 경찰서에 사건을 접수하지만 직접 찾으라는 얘기를 듣는다. 안토니오는 친구 바이아코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다음날 아침, 안토니오와 부르노는 바이아코와 함께 자전거를 찾아 나서지만, 상황은 어렵기만 하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도 자전거를 찾던 안토니오는 마침내 도둑을 발견한다. 도둑과 이야기 하던 노인을 쫓아 도둑의 주소를 알아내지만, 노인은 달아난다.

 안토니오는 마음이 상한 아들을 달래려고 식당을 찾는다. 안토니오는 아들과 자신이 받을 수 있었던 급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안토니오는 점쟁이를 찾아간다. 고작 “당장 찾을 수도 있고, 영영 아닐 수도 있어.”라는 말만 듣고 점쟁이 집을 나서던 부자는 도둑과 마주친다. 추격 끝에 청년을 붙잡지만, 동네 사람들이 청년을 비호하고 있는 사이에 청년은 간질을 일으키고, 브루노가 그 사이 경찰을 데리고 온다. 경찰관과 함께 집안을 수색하지만 자전거는 찾지 못한다. 경찰관 청년을 둘러싼 동네 사람들을 보라고 하며 안토니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 말이 옳다고 해도 증명할 방법이 없어요. 당신이 정직하더라도 곤란하게 될 수가 있어요. 당신은 저 사람들을 모두 상대해야 해요.”

 안토니오는 분노에 가득 차 돌아선다. 길에 즐비하게 늘어선 자전거를 보며 갈등하던 안토니오는 아들을 전차에 태워 보내고, 자전거를 훔쳐 달아난다. 전차를 기다리던 브루노는 그 장면을 목격한다. 안토니오는 마침내 붙잡힌다. 울며 따라오는 브루노를 본 자전거 주인은 경찰서로 끌고 가려던 안토니오를 풀어준다. 안토니오는 아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길을 걷는다.

 중·고교 시절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했다. 1981년, 고1 때였다. 자전거를 새로 산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도둑을 맞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끝내 찾지 못했다. 분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때의 심정과 안토니오의 심정을 비교할 수는 없다. 안토니오에게 자전거는 생계 수단이었다. 그 절박함 때문에 그는 도둑을 잡았으면서도 자신의 자전거를 되찾지 못하고 돌아오던 길에 자전거를 도둑질 한다. 아들의 눈물 덕분에 경찰서에 끌려가지는 않지만, 아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 안토니오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다가왔을까.

 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1902∼1974)는 영화에 현실을 담았다. 네오리얼리즘의 선구로 불린다. 그 정보만으로도 그가 담아낸 현실이 어떤 색조를 가지고 있는 가를 유추할 수 있다. ‘자전거 도둑’이 보여준 그림은 40시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벌어진 사건이다. 그러나 그 시간이 보여주는 그림은 삶의 한 단면이 아니다. 로버트 맥키는 이렇게 말했다.

 “등장인물이 작가의 상상 속에 등장할 때 그 인물은 이야기로 전개될만한 수많은 가능성을 함께 가져온다. 원한다면 작가는 그 인물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서 그가 죽어서 사라질 때까지의 일들을 따라다닐 수도 있다. 한 등장인물의 인생은 그가 실제 인물로서 누릴, 수만 시간들, 복잡하고도 다양한 층위를 가진 시간들을 포괄한다. 大家는 이들 중 다만 몇 순간을 골라내지만 그를 통해 삶 전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전거 도둑’은 비록 2차 세계대전 후라는 특별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서민들이 처한 혹독한 삶의 풍경을 모두 담아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가슴 아픈 것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서민들의 혹독한 삶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토니오의 시절과 지금 뿐만이 아니다.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안토니오가 보여주는 그림은 낯선 그림이 아니다. 토마스 홉스가 말한 ‘만인 대 만인 의 투쟁’은 언제나 유효했다. 인류 역사가 존속되는 한 홉스의 진단은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라는 것에 자신 있게 표를 던진다. 홉스는 또 이란 말도 했다. “계약이란, 칼이 없다면 말에 불과하다.” 그것이 인간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계약이 있어야 하지만, 이익을 위해 언제든 타인을 이용하고 밟아 버릴 수 있는 존재인 인간을 강제할 수단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폴 발레리는 “우리 시대의 고민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과거와 다르다는 데 있다.”고 했다.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부조리와 잔혹한 불합리를 자연 상태로 받아들이고 순응해야 하는가. 눈물 흘리는 아들의 손을 잡고 피눈물을 삼키며 어두운 거리를 쓸쓸히 걸어가야 하는가. 그도 동의할 수 없다. 역사를, 지성을, 도덕을 말할 것도 없다. 다만 계약을 말하고자 한다.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의 이익을 가로채거나 해치지 않겠다는 그 계약 말이다. 프랑스 철학자 샤를 페기는 “일반적으로 법은 냉혹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냉혹한 것은 당연히 법이라고 믿게 된다.”라고 말했다. 법은 냉혹하지 않다. 사회적 계약인 법을 위반하고도 낄낄거리는 인간들이 냉혹한 것이다. 그런 류들의 냉혹함에 분노할 줄 알아야 우리 안토니오들의 눈물이 거둬진다.

 한 포털의 영화 정보에는 이해가 안 되지만, 이 영화에 ‘청소년관람불가’라는 꼬리표가 붙였다. 이 영화에는 섹스도, 폭력도 등장하지 않는다. 현실의 고통이 그대로 드러나 있을 뿐이다. 그게 이유일까?

천세진 <시인>



 천세진님은 눈만 들면 산밖에 보이지 않는 속리산 자락 충북 보은에서 나고자랐습니다. 하여 여전히 산을 동경하고 있는 그는 광주에서 시인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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