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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진 풍경과말들]`동사서독 Ashes Of Time’
천세진
기사 게재일 : 2015-01-09 06:00:00
죽음이 시와 같다니…

 - 1994 / 19세 이상 관람 가 / 100분 / 감독 : 왕가위 / 출연 : 장국영(서독 구양봉 역), 양가휘(동사 황약사 역), 임청하(모룡연, 모룡언 역), 양조위(맹무살수 역), 장학우(황칠 역) 등

 

 백타산에 살던 구양봉은 일찍 부모를 잃고 형이 그를 키웠다. 구양봉의 꿈은 유명한 검객이 되는 것. 그러나 구양봉은 무술연마를 위해 고향을 떠날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여인과 고향에 남을 것인가의 기로에서 무사로서의 길을 택한다. 그 때문에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그의 형과 결혼한다.

 10년 후, 구양봉은 사막으로 가서 여관을 개업하고 살인청부업을 시작한다. 구양봉에게는 황약사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도 사랑의 상처를 갖고 있다. 그는 한때 절친했던 친구의 부인과의 불륜으로 도화림을 떠났다.

 매년 복사꽃이 피는 시절이면 그는 구양봉을 찾아와 함께 술을 마시고는 백타산으로 구양봉이 사랑했던 여인을 만나러 떠난다. 10살 난 아들이 있는 그녀는 아직도 구양봉을 사랑하고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일 년 전 황약사는 고소성 밖에서 모룡연이라는 사내와 우정을 쌓게 되고, 그의 여동생과 결혼할 것을 언약한다. 그러나 황약사는 약속을 어긴다. 모룡연은 황약사가 약속을 어긴 것에 분노하며 구양봉을 찾아와 황약사를 죽여 달라고 한다. 그가 떠난 뒤 이번에는 그의 여동생인 모룡언이 나타나 그녀의 오빠를 죽여주면 오빠가 제시한 돈의 2배를 주겠다고 한다. 구양봉은 모룡연과 모룡언이 동일인임을 알게 된다.

 한 젊은 처녀가 구양봉을 찾아와 고위층의 수하들에게 죽임을 당한 남동생의 복수를 간청한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것은 달걀 한 바구니와 당나귀 한 마리 뿐. 구양봉은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만 그녀는 도와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집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고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도화림에서 온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검객 맹무살수가 구양봉을 찾아와 살인청부일을 하겠다고 자청한다. 그는 눈이 완전히 멀기 전에 복사꽃이 피는 것을 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갈 돈이 필요했다. 그는 아내가 절친한 친구와 부정을 저지르자 집을 떠났다. 황약사가 바로 그의 친구다.

 가진 것 없이 멀리 변방에서 찾아든 검객 홍칠은 구양봉의 눈에 띄어 청부검객이 된다. 그러나 그는 구양봉의 뜻을 어기고 구양봉의 집 앞에서 남동생의 복수를 간청하던 가난한 처녀의 복수를 해준다. 그가 받은 대가는 달걀 한 개. 호위무사들과의 싸움에서 손가락 하나를 잃고 부상을 당한 홍칠은 사경을 헤매다 그를 찾아온 아내와 함께 구양봉을 떠난다.

 세월이 흐르고, 구양봉은 형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자신의 여관에 불을 지르고 사막을 떠난다.

 한국에 소개된 영화명은 동사와 서독이라는 두 인물에 초점을 맞춘 ‘동사서독’이지만, 영어로 된 제목은 ‘시간의 재’다. 영화 속에는 죽음이, 가을날의 낙엽처럼 어지러이 흩어져 내린다. 죽음은 시간의 끝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억과 흔적들이 추악하든 아름답든 잔영처럼 오래도록 죽음의 자리에 남아 어른거린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어른거림은 산 자의 눈에, 산자의 기억에 깃든 것이다. 산 자의 눈과 산 자의 기억도 사막을 휩쓰는 바람이 지나고 나면 사라진다. 그렇게 죽음은, 시간의 종말은 바람에 날려가는 재처럼 허망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칼이 번득이고, 나가떨어지는 팔 다리와 더는 움직임이 없는 널브러진 육신들이 등장한다. 어떻게 해도 아름다울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런데, 죽음이 흐르는 영화 내내 시(詩)가 흘렀다. 그것도 죽음을 따라 말이다. 죽음이 시와 같다니….

 하루하루 눈이 멀어가는 맹무살수는 구양봉에게 고향으로 가기 전 반드시 한 번은 마주치고 가야 할 마적대가 언제 오느냐고 묻는다. 눈이 더 멀기 전에 와야 하는 것이다.

 “마적대는 언제 오나?”

 “며칠 내에 올 거야.”

 “복사꽃이 시들기 전에 빨리 와야 할 텐데. 꽃은 언제 피는 지 알 수 있지만, 마적대는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맹무살수가 그토록 마적대를 처리하고 고향에 가서 보고 싶었던 복사꽃은 복사꽃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 도화(桃花)였다. 아내 도화는 황약사와 불륜을 맺었지만, 그는 황약사에게도, 아내에게도 어찌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을 것이다. 이제 맹무살수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마지막으로 고향을, 아내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맹무살수에게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복사꽃은 자연의 순환이지만, 사람의 시간은 꼭 그렇게만 흐르지 않는다.

 누가 물었다. “시(詩)로 뭘 할 수 있나?” 대답? 대답은 없다. 할 수도 없고, 해야 할 것도 아니다. 왜 그렇게 모든 것에 의미를 두고 살아야 하나? 물론, 이 물음은 스스로에게 먼저 던지는 것이다. 누구보다 남을 많이 비판해 왔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인간이 사는 사회가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믿는다. 무수히 많은 의미를 담은 질문들이 주어졌고, 그 질문에 답이 주어졌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둥지 튼 사회가 발전해 왔다고 그들은 말하고, 또 믿는다.

 나는 믿지 않는다. 인간 하나하나를 저울에 올려놓고 무게를 재어보면 재와 같다. 불길에 휩싸여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가벼워지고 마침내는 홀연히 바람에 날려 가는 그 가벼운 재와 같다. 타 들어가며 남는 재는 번듯한 뭔가를 이루지도 않고, 누대에 걸쳐 칭송 받는 철학을 남기지도 않는다. 철학은 허명(虛名)과 함께 책 속에 박혔고, 뭔가를 이루려던 피와 땀은 앙코르와트나 피라미드의 바위 밑 속으로 사라져 갔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구양봉은 검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 무엇을 얻었나. 사랑을 잃고, 그가 쓴 것은 죽음의 기록들이다. 그가 죽음의 대가로 벌어들인 돈은 다 어디로 갔나. 이제 나도 세상을 읽는 눈이 멀어가고 있다. 세상에 독기를 뿜었으니 마땅한 일이다. 복사꽃이 시들기 전에 이 사막을, 도시를 떠나고 싶다. 마지막 칼은 언제 휘둘러야 하나. 맹무살수처럼 되려나.  

천세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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