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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지나간 자리에서 종자 생각
전고필
기사 게재일 : 2015-05-13 06:00:00

 이른 아침 담양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간밤의 바람이 고추밭을 휩쓸었다는 소식이다. 어지간하면 전화를 주시지 않는 터라 긴장을 하고 말씀을 나누니 와서 함께 다시 세우자는 것이었다. 당연히 가야할 일이어서 헌 옷가지를 챙겨 입고 집으로 향했다.

 광주댐으로 가는 길, 메타세콰이어의 잎새들이 도로 바닥에 자욱하다. 차바퀴가 정리해낸 길마저 훤히 눈에 들어온다. 5월부터 태풍의 영향권에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갈수록 온난화 되가는 지구의 증표들은 이렇게 이상 징후로 나타나니 그에 대한 대비는 또 얼마나 단단히 해야 할 것인지. 그 무엇보다 주원인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고민은 몇몇 선지자들의 몫으로 돌리고 있는 처지이다.

 생각해보니 얼마 전 한 선배가 보내준 메시지가 뇌리를 스친다. 우루과이의 호세 대통령이 한 연설문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인류가 만든 이 거대한 세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이 같은 소비 사회에 통제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발전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지구에 온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바로 눈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량 소비가 세계를 파괴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고가의 상품을 소비하는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소비가 사회의 모토인 세계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많이 그리고 빨리 소비를 해야만 합니다. 소비가 멈추면 경제가 마비되고 경제가 마비되면 불황이라는 괴물이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대량소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상품의 수명을 단축해야 하고 가능한 많이 팔도록 해야 합니다. 즉, 10만 시간을 사용하는 전구를 만들 수 있어도 1000시간만 쓸 수 있는 전구만을 팔아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대량소비 사회, 일회용의 사회가 가져온 오남용이 야기한 지구 온난화의 피해는 잘사는 나라나 못사는 나라나 피해가지 못하면서도 이렇듯 범지구를 생각하는 이와 자국의 이익만을 관철하려는 몇몇 국가들 사이에 우리나라는 어느 위치에 있고, 나는 또 어디에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번져왔다. 깊게 고민하고 행동해야 할 때라는 위기감을 느끼며 도착한 집. 어머니는 아침을 못 먹었으리라 여기고 밥과 돼지 주물럭을 해 놓으셨고 반주까지 내 놓으셨다. 저 돼지도 대량생산의 산물일 것이라 여기면서도 밥을 휘적휘적 먹고 밭으로 갔다.

 삼년 전 만든 비닐하우스의 지붕의 비닐 절반이 찢긴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대단한 바람이라지만 한편으로는 하우스의 빔을 건드리지 않은 것만으로 안도가 되기도 했다. 삼년 정도 사용하면 다시 새것으로 교체해야 하는 것이 비닐하우스용 비닐이기에. 고추밭은 엉망이었다. 철제 지지대는 이곳저곳으로 널브러져 있고, 수분을 유지하면서 잡초의 발아를 막아주기 위해 고랑위에 설치한 비닐도 꼬여져 있다. 그리고 금세 풋고추를 먹을 것 같았던 고추들은 잎새마저 바람에 내어주고 꺾이거나 나목으로 서 있는 것이 태반이었다.

 태풍이 데려다준 강풍의 힘이 새삼 느껴졌다. 그랬거나 말거나 이제 부터는 다시 비닐도 씌우고 흙으로 고정시키면서 말뚝도 박아야하고, 새 고추모도 심어야 한다. 질퍽거리는 밭에서 어머니와 모처럼 웅크리고 비닐을 다시 펴고 흙을 쓸어 올리고, 새 모종을 심고 지지대에 끼우면서 도란거리며 말씀 나눈다. “옛날에는 이런 것 다 소용없었어야”로 시작되는 말씀은 과거 종자를 직접 받아 보관하고 실한 종자를 이웃과 나누던 시대의 이야기다.

 이제는 그런 흔적 찾기가 너무나 어려운 세상인 것은 아들도 알고 있다. 그 유명한 청양고추마저도 외국 종자회사로 넘어가는 현실, 어릴 적 이른 아침 라디오를 타고 나오던 광고 태반을 장식하는 서울종묘, 중앙종묘, 흥농종묘 같은 회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세미니스나 노바티스 같은 외국기업으로 팔렸던 것이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일까. 병해에 강하고 비바람에 강한 것들만 골라서 씨앗으로 보관하여 다시 꺼내 쓰던 것이 생산 증대·편리성 등으로 치환하면서 어느 사이 종자를 사다가 쓰면서 진행되는 종자주권의 문제까지. 쓰러진 고춧대 사이에서 그야말로 많은 고민이 들었다. 호세 대통령의 말씀처럼 저 대규모 자본의 보이지 않는 쟁투 안에서 조금이라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곰곰이 질문해 보는 태풍 노을이 준 경각심을 기록해 둔다.

전고필



`전고필’ 님은 항상 `길 위에’ 있습니다. 평생 떠돌며 살고자 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관광의 핵심은 `관계’를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읽어내는 눈. 그것들을 찾아 평생 떠돌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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