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난 해소”vs“재정 부담” 입장차

▲ 1968년, 당시 제일은행 광주지점 앞의 금남로 확장공사의 모습이다.

 1960년대 중엽 금남로 일대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도로 끝 전남도청 본관건물은 아직 2층이었다. 현재처럼 3층 건물로 증축된 것은 70년대 중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청 앞에는 광장도 없었다. 그래서 도청 앞 도로는 지금처럼 광장을 중심에 둔 Y자형이 아니라 T자 형태를 띠었다.

 도청 맞은편에는 무덕전과 헌병대도 있었다. 무덕전은 20년대에 신축된 것으로 알려진 목조건물로, 50년대부터 상무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불리고 있었다. 참고로 이 건물은 5·18과 관련한 현재의 상무관과 이름은 같았지만 그 위치나 형태, 건축 시기는 모두 달랐다.

 

12미터 아스팔트 도로…수십미터 고목도

 

 금남로1가 1번지의 전일빌딩도 당시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였다. 그 자리엔 2층 규모의 호남신문 사옥이 있었는데 62년 이 신문이 폐간됨에 따라 당시 전남일보의 사주 김남중이 이를 인수했다. 하지만 아직 빌딩건축이 시작되지는 않았다. 전일빌딩 신축은 68년 3월에 시작됐다. 그러나 그 맞은편 YMCA 건물은 이미 현재와 같은 모습을 거의 갖춘 상태였다. 그리고 그 아래쪽의 광주관광호텔은 한창 건물신축이 진행 중에 있었다. 관광호텔 맞은편에는 3층짜리의 농협 광산지소과 대한생명 빌딩이 있었고, 3가 끝인 현재의 가톨릭센터 일대에는 법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과 비교해 가장 두드러진 차이라면 금남로의 폭이 아직 12미터였다는 점이다. 일부의 주장이기는 했지만 이 도로를 통해 하루 평균 2000여 대의 차량이 통과했다. 노면이 아스팔트로 포장돼 있기는 했지만 아직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었고 지금처럼 인도를 따라 은행나무 가로수가 식재되지도 않았다. 심지어 4가의 중앙교회 앞에는 높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고목이 도로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얼마간 고풍스런 모습을 띠기도 했다.

 이런 금남로의 확장 계획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67년이다. 그러나 금남로 확장에 모두가 동의하거나 공감했던 것은 아니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도로확장에 대한 의견이 갈렸고, 전남도와 광주시 간에도 의견이 달랐다.

 

 세입 1억 원으론 금남로 확장 무리였다?



 금남로 확장에 적극적이었던 쪽은 전남도였다. 전남도가 금남로 확장에 적극성을 띤 표면적인 이유는 도로확장이 광주도심의 만성적인 교통적체를 해소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전남도는 당시 금남로의 하루 차량 통행량이 2000대에 달하고, 향후 20년이 지나면 6000대로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리고 금남로가 앞으로 감당할 차량통행량을 추산해 적어도 노폭 30미터 이상의 도로가 필요하다며 생각했다.

 그러나 광주시의 입장은 달랐다. 당시 광주시의 자체 세입은 1억 원에 불과했다. 금남로 확장엔 7억~10억 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됐다. 중앙정부의 예산지원이 있더라도 광주시가 상당액을 부담할 처지였으므로 신중한 입장이었다. 여기에 광주시에는 더 시급한 현안이 있었는데 신시가지의 조성이었다. 신시가지란 훗날 제1토지구획정리지구로 알려진 지역에 대한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광주역을 대인동에서 중흥동으로 옮기고, 새로운 역을 중심으로 40만여 평의 대지에 방사성 형태의 도로망을 구축하고 택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67년 당시에 이 사업은 한창 진행 중에 있었다.

 

 광주천 중심 좌우편 도시팽창 진행

 

 또한 시내의 도로 문제에 대해서는 금남로 확장보다는 격자형 도로개설을 더 선호했다. 원도심을 횡단하는 금남로는 그대로 둔 상태에서 그와 교차하는 중앙로나 광남로(지금의 독립로)를 뚫는 쪽이 더 났다고 본 것이다. 이는 그 무렵 광주의 도시팽창이 금남로 축선이 아니라 광주천을 중심으로 좌우편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광주시는 금남로 확장계획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으로 충장로의 사례를 환기시켰다. 충장로는 67년 당시에도 금남로보다 비좁았다. 그럼에도 이 도로는 누구나 인정하듯 광주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로였다. 도로를 넓힌다고 도로가 역동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게 광주시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광주시의 입장은 당시 광주시장이던 노인환의 생각이기도 했던 것 같다. 노인환은 63년 1월부터 광주시장으로 재임 중이었다. 하지만 금남로 확장계획은 몇 년 뒤 전남도가 생각한 방향으로 진행됐다. 노인환은 68년 4월 갑자기 시장 직을 그만 뒀고 그 후임에 장형태가 임명됐다. 이 시장교체 직후에 금남로 확장 계획은 전광석화처럼 추진됐다. 그리고 67년 9월 금남로 확장계획은 거의 확정수순에 들어갔다. 공사는 2년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68년에는 도청 앞에서 3가까지, 69년에는 4~5가를 확장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 계획은 그대로 실행됐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 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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