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청 분수대·80년 5월·금융의 중심지 ‘기반’

▲ 1969년 금남로 확장공사를 위해 도로 왼쪽의 건물들을 철거하는 광경. 금남로 5가 쪽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광주시립민속박물관 제공>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금남로는 1969년 12월 확장공사의 산물이다. 이 도로 확장 공사와 함께 금남로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수만 가지의 새로운 모습들이 등장했다. 그중 하나가 구도청 앞 분수대다. 일부에서는 이 분수대가 처음 등장한 시기를 70년대 초엽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분수대는 확장으로 새로 생겨난 도청 앞 광장(5·18 민주광장)을 장식하는 기념물이자 금남로 확장을 자축하는 의미로 세워진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광주공원이나 시민관에서 열리던 8·15 광복절 기념식이 69년에 유독 도청 앞에서 열린 것도, 그리고 그때 분수대 물이 처음으로 솟구쳤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확장 축하 위해 설치된 도청 앞 분수대

 

 부지가 광장으로 편입되는 바람에 헐린 무덕전을 대신해 상무관이 세워진 것도 69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일빌딩도 확장 전부터 건물 신축이 계획됐지만 신축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확장 직후인 70년대부터였다.

 또한 금남로를 지나면서 의식하거나 눈 여겨 보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금남로에 가로수가 식재된 것도 확장공사 이후부터다. 물론 처음에는 지금처럼 은행나무가 식재된 것은 아니었다. 확장 직후에는 플라타너스가 도로연변에 심어졌는데 70년대 중반 가로수 수종을 바꾸면서 지금처럼 은행나무로 교체됐다. 80년 5월을 기록한 사진에 등장하는 금남로의 가로수가 죄다 은행나무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편, 확장된 금남로 덕분에 민주화가 앞당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듯싶어 한마디 보탠다. 금남로 확장이 광장 기능을 제공하면서 그 덕분에 집회와 시위가 빈발해졌고 궁극적으로 민주화가 앞당겨졌다고 상상하는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의 생각대로라면 단순히 물리적으로 도로를 넓히기만 해도 집회와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금남로가 집회와 시위 공간이 된 것은 도로확장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금남로 확장으로 민주화가 앞당겨 졌을까?

 

 사실 금남로가 정치적 집회장소로 사용된 것은 도로 자체의 너비 때문이라기보다는 도로 끝에 있는 전남도청 때문일 것이다. 오랫동안 도청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실제로 확장 이전인 1960년 4·19 당시에 광주에서 가장 많은 총격 희생자들이 발생한 장소도 도청 앞이었는데 이 사건은 당시 도청을 향해 다가서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발포한데서 비롯된 일이었다. 61년 5·16쿠데타 이후 광주에서 발생한 반정부 집회나 시위가 열린 곳도 도청 앞이었다. 그럼에도 금남로가 집회나 시위의 장소처럼 비쳐지는 것은 그곳이 도청을 향해 가는 경로였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즉 일종의 착시현상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공간적으로 금남로와 도청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80년 5월은 이런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다만, 이 도청이 2005년 무안 남악리로 이전되고 그 자리에 현재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서면서 금남로가 지닌 정치색이 많이 탈색된 것도 사실이다. 공간의 상징이란 측면에서 문화전당의 등장은 금남로의 정치적 의미를 희석 내지 중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최근의 촛불집회를 보면, 그럼에도 금남로가 지닌 공간적 속성은 여전히 계속되는 것 같다.

 

교통 해소 여전, 광주천 복개 계획 무산은 다행

 

 집회나 문화행사가 없는 평소에 오늘날 금남로는 광주의 대표적인 금융 중심지 중 하나로 존재하다. 그리고 이런 모습 역시 금남로 확장의 결과다. 물론 확장 이전부터 제일은행이나 한일은행(이들 은행은 90년대 외환위기 이후로 사라졌다) 등 몇몇 은행이 금남로 일대에 점포를 냈지만 이런 금융기관의 밀집이 본격화된 것은 확장공사 이후부터다. 1969년 한국은행 광주지점이 충장로3가에서 금남로3가로 이전했고, 같은 해에 국민은행도 충장로에서 금남로로 이전했다. 이후 중소기업은행과 상업은행이 76년에 충장로에서 금남로로 영업점을 옮겼고, 외환은행은 74년 광주지점을 낼 때부터 전일빌딩 옆에 점포를 냈다.

 반면 금남로 확장의 표면적인 이유였던 시내 차량교통의 정체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금남로 확장이 끝나기 전부터 시내교통의 해소라는 명분으로 광주천 복개가‘진지하게’계획된 적이 있었다. 복개공사는 증심사로 들어가는 길목인 원지교에서 광천교까지의 구간으로, 사실상 우리가 아는 광주천을 거의 전부 콘크리트로 뒤덮어 도로와 상가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다행히’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다만, 그 변형된 결과로 지금의 양동복개상가와 광주천변도로가 생겨났다. 모두 금남로 확장과 무관치 않은 일들이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 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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