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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갈피갈피]경양방죽 아래 방죽밑들의 ‘축축한’ 역사
중흥동과 신안동의 방죽밑들
조광철
기사 게재일 : 2017-01-18 06:00:00
▲ 1960년대 방죽밑들의 태봉산과 경양방죽 배수로.

 현재 광주역이 들어선 중흥동에서 그 서쪽인 신안동에 이르는 지역은 원래 드넓은 들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에 그린 광주의 옛 지도는 이 들판을 대야(大野)라 표현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 들판에 살던 사람들은 이 들이 계림동의 경양방죽 아래쪽에 해당한다 하여‘방죽밑들’또는 경양방죽을 한때 금교방축(金橋防築)이라 부른 데서 착안해 ‘금교평(金橋坪)’이라 부르곤 했다. 그 면적은 얼추 60만 평. 주변에 시선을 가로막은 장애물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오랫동안 이 들판의 대표적인 풍경으로 6만여 평의 경양방죽과 그곳으로부터 1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봉곳하게 솟은 해발 50여 미터의 태봉산을 손꼽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물론 요즘처럼 추운 겨울이면 북쪽에서 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이 그대로 들판을 가로질러 광주시내로 쏟아 들어와 오금을 저리게 하는 면도 있었지만 말이다.

 

 방죽밑들, 질퍽한 토질인데다 허허벌판

 그래서일까, 땅은 넓었지만 이곳엔 마을이 많지 않았다. 신안교 근처의 신촌마을, 광주역 근처의 태봉마을이 고작이었다. 듬직한 산자락에 기대어 살기를 좋아했던 우리 민족의 성벽 탓에 이곳처럼 사방이 툭 트인 곳은 어딘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신촌마을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꽤 오랜 역사를 간직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태봉마을은 그 역사가 그렇게 긴 편이 아니었다.

 이처럼 들의 규모에 비해 마을이 적었던 것은 이곳의 질퍽한 토질 때문이기도 했다. 경양방죽 위쪽인 계림동이나 산수동에서는 1960년대까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을 했지만 이곳에선 “장화가 있어도 못 산다”고 할 지경이었다. 해빙기엔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이 천 근”이라 할 정도로 흙이 장화를 옭아맸다. 러시아의 라스푸티차(겨울에는 흙바닥이 얼어 다닐 수 있지만 해빙기에는 다시 진흙탕이 되어 다닐 수 없게 되는 현상)이 따로 없었다.

 이런 토질은 이곳이 저지대라 물 빠짐이 나빴던 결과였다. 경양방죽의 위쪽은 평지라 해도 해발 40미터 내외였던 데에 비해 이곳 방죽밑들은 그보다 5~10미터나 낮았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배수 문제는 이곳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1950년대 취로사업의 일환으로 경양방죽에서 내려오는 물을 서방천이 있는 신안교 쪽으로 빼내기 위한 수로가 개설됐다. 이 수로는 60년대에 석축으로 보강되기도 했다. 하지만 70~80년대에 이 지역의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악취와 쓰레기 투기 등을 이유로 복개돼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그렇지만 사실은 지금도 이 배수는 광주역 앞을 지나고 있다.

 

 저습한 방죽밑들서 태봉산에 오른 뱀들

 그런데 주로 경양방죽의 배수 기능에 초점이 맞춰진 탓에 이 수로가 방죽밑들 전체의 배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태봉마을에서 200~3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아직 태봉산이 아직 건재했을 무렵 그 일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 산을 일러 ‘뱀산’이라 부르곤 했다. 뱀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독 이 산에 뱀이 많았던 것은 그 주변의 방죽밑들이 저습했던 사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뱀의 천성이 저습한 곳을 좋아한다 해도 변온동물인지라 체온을 올리기 위해서는 하루에 한두 번쯤은 비교적 건조하고 햇볕이 잘 드는 이 산으로 기어 올라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죽밑들이 저습했던 것은 단순히 지대가 낮고 토질 자체가 원래부터 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위쪽의 경양방죽에서 방류한 물의 영향이었을까? 이 일대의 토양기록을 보면 대부분이 하성충적층(河成沖積層)으로 나온다. 강물에 실려 온 흙과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흙이란 뜻이다. 그런데 방죽밑들의 광활한 들판을 이런 흙으로 채우려면 상당한 규모의 하천이 이곳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눈을 씻고 봐도 이곳엔 그만한 하천유입이 없다. 물론 하천유입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오늘날 무등산 서쪽자락인 지산동에서 발원한 동계천은 원도심을 지나 누문동에서 광주천으로 유입한다. 그래서 한때 누문동 쪽에선 이 하천을 아예 ‘누문천’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광주천 향하던 동계천 방죽밑들로 유입돼

 그런데 동계천의 큰 줄기가 누문동으로 향한 것은 1920~30년대에 광주천 정비 공사를 하면서부터다. 그 이전에 동계천은 북동 까지 내려왔다가 90도에 가까운 각도로 꺾여 광주천으로 향하는 대신에 그대로 직진해 방죽밑들로 향했다(그 물의 일부는 지금의 대인시장 근처에서 경양방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죽밑들로 향하는 동계천 수로는 최소한 일제강점기 말엽까지도 방죽밑들에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동계천은 큰 하천이 아니었다. 그 이름에 천이 붙어서 그렇지 사실 동계천은 사막의 와디처럼 갈수기에 어김없이 바닥을 드러내는 작은 개울이었다. 그리고 이런 수준의 개울은 어디서나 그렇듯 방죽밑들에도 많았다. 그렇다 해도 이들 개울이 제아무리 많다한들 방죽밑들 전체에 두터운 하성충적층을 만들어내기엔 부족했다. 또 방죽밑들 서쪽 끝을 흐르는 서방천의 범람으로 이 거대한 들판의 형성을 설명하기도 힘들다. 아마도 방죽밑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엄청난 시간이 쌓인 결과일 것이다. 그 뒷얘기는 다음 호에서 이어가기로 하자.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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