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지에서 호수로 변화 과정

▲ 경양방죽(1946년)의 모습. 뒤편 건물은 당시 광주고등학교.<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한때 경양방죽이 있었던 계림동에서 그 아래 중흥동과 신안동에 이르는 이른바 ‘방죽밑들’일대의 토양은 하성충적층이다. 지난번에 잠깐 얘기한대로 하성충적층은 강물이 실려 온 흙과 모래·자갈이 쌓인 것이다. 그리고 이 충적층은 과거 광주천 물이 이곳까지 밀려들었던 흔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같은 하성충적층이라 해도 광주천변의 구도심 지역과 달리 이곳은 배수가 불량한 지역이었다. 즉, 오랫동안 늪지였다는 얘기다. 고대에도 그랬고 도시개발이 막 시작되던 1960년대에도 그랬다. 사정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당시 광주읍내(읍성이 위치했던 일원)는 한쪽에 하천이 흐르고 다른 한쪽엔 거대한 늪지에 에워싸인 형국이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광주 읍내를 물 위에 뜬 배의 형상이라 여긴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에 뜬 배처럼 보였던 광주 읍내



 그런데 이 늪지를 가로질러 기다란 둑길이 있었다. 대한제국 시절에 일본군이 제작한 지도로 관련 학자들이 흔히 ‘구한말 지형도’라 부르는 것에는 이 둑길이 광주읍내와 우산동의 경양역 사이를 잇는 간선도로로 묘사돼 있다. 경양방죽의 어원이기도 한 이 역은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때 이미 우산동 383번지 일대에 있었다. 따라서 오랫동안 이 둑길은 광주 읍내와 경양역을 잇는 도로 역할을 했던 셈이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광주읍성의 존재, 경양역의 위치에 대해서는 언급하면서도 경양방죽에 대해서는 이렇다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는 1530년까지 아직 방죽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때까지 읍내와 경양역 사이엔 늪지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경양역은 이 둑길이 없었다면 제대로 역 기능을 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처음에 역이 다른 곳에 있었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실제로 경양역이 원래 오치동에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 얘기엔 의심스런 구석이 많다.

 그중 하나는 오치동에서 우산동으로 옮긴 시기가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다. 1930년대 일본인 야마모토 데스타로가 ‘광주군사’란 책을 펴내면서 처음 구전이라 밝히면 꺼내든 얘기엔 경양역을 오치동에서 몰아낸 이씨들(아마도 함평이씨일 것이다)이 오치동에 정착한 시기를 1470년대로 추정했다. 그런데 김영현의 책 ‘광주오치’(2003년)엔 1510년대 조상의 묘를 각화동에 쓰면서 함평이씨들이 오치동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착시기가 어느 쪽이든 1530년 ‘승람’엔 광주의 유력한 성씨로 함평이씨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들이 경양역을 오치동에서 몰아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역과 역 잇는 둑길의 탄생



 다시 둑길 얘기로 되돌아가보자. 광주읍내와 경양역 사이의 도로는 중요했다. 이 길은 담양을 거쳐 담양 무정면에 있는 경양역에 속한 덕기역을 잇는 길의 일부라는 점에서도 중요했다. 그런데 역 앞의 거대한 늪지가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생각하기에 안정적인 도로이자 역과 역을 잇는 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늪지 위로 둑을 쌓아 길을 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이 둑이 생기면서 점차 그 안쪽에 물이 차 방죽이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먼저 둑이 생기고 이후 저수지 기능을 했다는 이런 추측은 오랫동안 저수지로서 경양방죽에 대한 기록이 없었던 사실에서 방증을 얻을 수 있다.

 1580년대 고경명의 시 ‘경양모정’이 있다. 새로 부임한 찰방(찰방은 역의 최고 책임자)이 지은 정자와 그 주변 풍경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에 ‘너른 들판이 마을을 휘감고 / 정자의 연못은 숲 우거진 언덕과 마주하네’란 구절이 있다. 정자 주변을 노래하면서 너른 들판과 언덕을 언급하면서 경양방죽, 즉 꽤나 큼지막했을 호수에 대해선 일언방구가 없었다. 그때 하필 방죽이 말라 시에 끌어들이기 곤란했을까?

 

 문학작품에서 발견한 경양방죽 역사



 이런 현상은 1600년대 조평년이 지은 시 ‘광주목사 이씨 어른께 드리다’에도 보인다. 새로 부임한 광주목사에게 ‘경양둑’위에서 술잔을 받잡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시를 짓던 시기가 봄이고 봄꽃이 만개한 희경루(충장로에 있었던 누각)의 운치를 얘기하면서도 정작 호수, 즉 경양방죽에 대한 얘기는 쏙 빼고 달랑 둑길(경양제)만 언급하고 있다. 이때도 방죽이 말라서일까?

 분명한 건 물을 담는 저수시설로서 경양방죽의 존재가 문학작품에 부각된 것은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뒤였다는 사실이다. 1620년대 광주목사 조희일과 그와 시를 나눈 양경우의 시에 처음으로 물을 가눈 인공시설로서 경양방죽이 암시되기 시작한다. ‘달을 품은 물가’ ‘낚싯대’ ‘드넓은 물가’ ‘뛰어오르는 물고기’등 비로소 경양방죽의 물과 관련된 시어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후 나온 문학작품들에 경양방죽이 저수지로 묘사되는 건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얘기를 장황하게 하는 것은 경양방죽에 대한 문학작품을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 방죽은 김방이란 사람이 굴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방은 실존인물이고 김제군수로 있으면서 유명한 벽골제를 수리해 성공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김방이 경양방죽을 팠다면 그 시기는 1400년대 전반기다. 하지만 그 이후 오랫동안 저수지로서 경양방죽에 대한 실제 문헌기록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아는 김방 축조설은 전설로만 전해지는 얘기란 의미다. 그렇다고 이 전설이 무의미한 것일까? 하나의 사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전승은 다양한 생각의 표현이다. 김방 전설과 실제 문헌기록의 차이는 경양방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인지 모른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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