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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갈피갈피]경양방죽을 표현한 다양한 묘사들
옛 글로 본 경양방죽
조광철
기사 게재일 : 2017-02-22 06:00:00
▲ 1872년 광주지도 속의 경양방죽_이 지도에서는 경양방죽을 `금교방축’이라고 기록했다.
 많은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과 달리 16세기까지도 경양방죽의 존재를 확연하게 드러내 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지금의 계림동이나 중흥동, 신안동 일대를 묘사한 조선시대의 기록들을 보면, 대체로 너른 들판, 혹은 습기 찬 들판 정도로 묘사하는 게 고작이었다. 다만, 그 들판 사이로 길게 뻗은 둑의 존재에 대한 언급은 16기 후반부터 등장한다. 하지만 이 둑이 과연 물을 가두기 위한 시설이었는지, 아니면 광주읍내와 경양역 사이의 저습지를 가로질러 놓은 도로용 둑이었는지는 당시의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경양방죽을 호수로 묘사한 최초의 기록

 그러던 경양방죽을 호수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시와 글은 17세기 초반부터 등장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1640년대 광주목사를 지낸 신익전(1605∼1660)의 ‘척금당기(滌襟堂記)’라는 글일 것이다.

 척금당은 경양역 근처에 있던 정자로 신익전이 광주목사를 그만 둔 직후 때마침 경양역 찰방으로 부임한 그의 외사촌 동생이 세웠다. ‘척금당기’는 이 정자를 세운 내력과 주변 풍경을 묘사한 것으로 총 606자의 한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경양방죽과 관련한 대목을 현대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멀리 수풀 무성한 들녘이 손에 잡힐 듯하고 그 너머로 광주읍성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척금당에서) 올려다보면 서석산(무등산의 별칭·역자 주)이 창연하게 하늘로 솟구쳐있고 거대한 둑과 저수지가 그 앞에 있다. 저수지에는 연꽃 수 만 송이가 심어져 있고 긴 둑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둑 위의 교목 수천 그루는 절양루(공북루라고도 불렸던 누각·역자 주)까지 곧바로 이어졌다.”

 물론 이 글 어디에도 경양방죽이란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글에서 언급한 저수지가 경양방죽임은 명확하다. 또한 이 글은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의 경양방죽을 가장 잘 묘사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맑고 너른 호수’ 표현 강조되기 시작

 하지만 경양방죽을 거대한 호수로 묘사한 기록과 시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750년대 이후부터다. 1750~60년대에 편찬된 지리지인 ‘여지도서’에서 경양방죽은 당시 광주에 있던 40여 저수지 가운데 첫 머리에 등장한다. 그 규모에 대해서도 ‘여지도서’는 “둘레가 5560척이고 수심이 5촌”이라 했다. 얼추 1600여 미터의 둘레에 물의 깊이가 1미터가 넘은 것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경양방죽을 웅장한 호수로 인식한 이런 기록은 다른 사람들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황윤석(1729∼1791)은 ‘경양호’란 시에서 “멀리 봄물 사이로 5리나 되는 제방이 있어 / 그 양편 들판 풍경이 동서(東西)로 확연히 나뉘네”라고 했다. 황윤석보다 조금 후대 사람인 유주목(1813∼1872)도 ‘경양을 거쳐 광주에 들어가며’란 시에서 “(전라도 김제의) 벽골제는 호남에서 가장 크다 하고 / (경상도 상주의) 검호(檢湖)는 문경새재 이남에서 가장 크다 하네 / 그러나 그 웅장함에 있어 (경양방죽은) 결코 뒤지 않고 / 그 맑음에 있어서도 저들 호수에 못지않네”라고 했다.

 맑디맑은 경양방죽의 수질은 곧 거울 같은 호수라는 인식으로 확장됐고 이에 착안해 이학규란 사람은 아주 멋들어지게 이런 표현을 시에 담았다. “광주성 동쪽에 벽옥 같은 호수가 있어 / 그곳으로 난 둑을 걷다보면 마치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네.”

 

 관개용 수원지로 쓰인 기록도 곳곳에

 이학규가 이 시를 지을 즈음인 1800년대 초엽 광주목사 김선(1750~?)이 방죽 근처에 경호정(鏡湖亭)이란 정자를 지었다. 이 정자는 20여년 뒤 또다른 광주목사 윤치용에 의해 응향정(凝香亭)이라 불렸으나 19세기 말엽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경호정이란 이름이 나온 것을 보면 경호정에 대한 기억, 아니 맑은 호수로서 경양방죽에 대한 19세기 사람들의 인식은 그만큼 강했던 것 같다.

 한편 18세기 후반부터는 경양방죽을 실용적인 측면에서 인식한 시들도 보인다. 정약용(1762∼1836)의 시 ‘경양방죽을 지나며’는 이런 구절로 끝맺는다. “드넓어라 관개(灌漑)의 원천이여 / 너른 들녘에 물을 흠뻑 댈 수 있겠구나.”

 그런데 이 시를 쓴 것은 1779년 2월이다. 농사철이라 하기엔 이른 계절이다. 그래서 이 시는 정약용이 실제로 경양방죽의 물이 그 아래 들녘으로 공급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쓴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마도 관개용 수원지로서 경양방죽이 지닌 가치를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양방죽이 실제 관개용 수원지였음을 말해주는 기록은 많다. 정약용과 동시대 사람인 이학규(1770~1835)는 “경양방죽은 호남에서 더 없이 큰 호수로 그 장대함은 한눈으로 흘깃 봐서는 다 알 수 없다. 광주는 3만 호가 사는데 이곳의 물로 100여리의 땅에 관개 용수를 공급한다”고 했다. 또한 이곤수( 1808~1888) 역시 ‘경호에서 유람하며’란 시에서 “드넓게 펼쳐진 잔잔한 호수가 들 한쪽에 있어 / (그 아래의) 너른 들에 물을 대주니 혜택 본 백성들 많다”라고 했다. 이렇게 경양방죽은 늪지에서 광주를 대표하는 풍경으로, 다시 농업용 저주지로 바뀌어왔던 것이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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