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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갈피갈피]사라진 경양방죽, 예고된 조짐들
일제강점기 경양방죽
조광철
기사 게재일 : 2017-03-22 06:00:00

 일제강점기 기록에 의하면 경양방죽 면적은 약 6만 평이었다. 축구장 30개에 달하는 면적이었다. 그리고 이 방죽의 물을 끌어다가 농사를 짓는 방죽 아래의 농토는 120만 평에 달했다.

 앞서 여러 차례 언급한대로 경양방죽의 물은 대부분 광주천에서 방죽까지를 이어주던 수로(봇도랑)을 통해 공급됐다. 그런데 봇도랑은 판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봇도랑은 현재 서석교 근처에 있던 조탄보(棗灘洑)에서 시작됐고 도랑의 높이는 이 보의 수위보다 낮아야 했다. 그래야만 수문을 열면 물이 자연스럽게 시내를 가로질러 경양방죽까지 흘러들 수 있었다. 이렇게 굴착한 봇도랑의 길이는 2km 남짓.

 

 수로 역할 봇도랑 쌓고 허물기 반복

 그러나 공짜점심은 없는 법이다. 봇도랑의 유지 관리에는 세심한 손길이 필요했다. 특히 조탄보가 그러했다. 지금의 광주천에 군데군데 놓인 콘크리트 월류보와 달리 당시 조탄보는 돌을 쌓아 만들었고 매년 수축을 되풀이했다. 여기서 수축이란 단순히 보의 헐거운 부분을 수리한다는 것이 아니라 쌓고 허물기를 반복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추축춘결(秋築春決)이라 하여 가을에는 보를 쌓아 물을 가두고, 봄철 모내기 때 물을 대고난 뒤에는 다시 허물기를 반복했다. 왜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했을까? 그렇지 않고 내버려 뒀다가간 낭패를 봤기 때문이다. 평소와 장마철 간 유수량의 차이가 컸던 광주천은 유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장마철에는 보 자체가 하천 흐름을 방해해 범람을 일으키곤 했다. 그래서 반드시 모내기가 끝나면 보를 허물어 광주천 흐름이 원활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 일은 누가했을까? 조탄보 관리에 대한 기록은 1910년대에 펴낸 이른바 ‘중추원 조사자료’란 문서에 남아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조탄보는 읍내 봇도랑과 경양방죽에서 각각 농업용수 혜택을 받는 농민들이 봄과 가을, 두 계절로 나눠 분담했다. 이 조사를 하던 해의 봄에 조탄보를 허무는 일은 읍내 봇도랑 수혜자들이 맡았고, 그해 가을에 보를 쌓는 일은 경양방죽 수혜자들이 담당했던 것 같다.

 

 오폐수 처리 하다 광주천과 단절된 방죽

 그런데 이 분업시스템은 오랜 세월 유지됐다. 18세기에 지금의 불로동 일대를 일컬어 보작촌(洑作村), 지금의 대인동 롯데백화점 일대를 봇도랑이 통과하는 동네란 뜻의 보통리(洑通里)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던 것은 바로 이런 흔적의 일부다.

 이렇게 수백 년 간 운영되던 시스템은 1920년대 초엽에 갑자기 작동을 멈추고 만다. 그런데 광주경제에서 아직 농업비중이 높았음에도 이 시스템이 작동을 멈춘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그때까지 경양방죽 일대에선 여전히 농사를 지었다. 그 때문에 일제는 광주천 물을 끌어다가 경양방죽을 채우기 위해 서문 밖의 요릿집 하루노야(훗날 적십자병원이 들어선 자리) 앞의 조탄보 터에 새로 월류보 축조를 계획한다.

 하지만 이 계획은 다른 이해관계에 밀려 흐지부지되고 만다. 이 무렵 광주 시내인구는 과거 수천 명에서 1만~2만 명을 부양하는 도시로 급변한다. 문제는 수많은 시내사람들이 쏟아내는 오폐수를 어떻게 배출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일제는 시내 하수구를 정비하는데 이때 옛 조탄보에서 서문 밖과 중앙로를 거쳐 경양방죽으로 이어지던 봇도랑을 모두 하수구로 바꾼다.

 그런데 당시 오폐수의 최종 배출구는 광주천이었고 오폐수가 원활하게 배출되려면 하수구는 광주천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야 했다. 그래야 도심에서 쏟아낸 오폐수가 광주천으로 흘러들어갈 터였다. 하지만 하수구가 광주천보다 높아지면 광주천 물의 일부가 시내 봇도랑을 가로질러 경양방죽으로 흘러들어가던 시스템도 작동을 그만둬야 했다. 실제로 20년대 후반 시내 하수구 정비를 하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런 하수구 정비로 지난 수백 년 간 하나의 수리체계로 묶여 있던 광주천과 경양방죽은 단절되고 만다. 경양방죽은 이제 그 위쪽 산록을 타고 흘러내려온 빗물만으로 채워지는 저수지가 됐다. 그 때문에 방죽의 수심은 1920년대 후반 1미터가 될까 말까 할 정도로 낮아졌다.

 

 택지 조성 위해 부분 매립→완전 매립

 물론 1930년대 초반까지도 경양방죽은 여전히 관개용 저수지 기능을 했다. 그러나 공급되는 물의 부족으로 저수량이 줄면서 방죽의 기능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런 맥락에서 30년대 초엽 이곳을 도심 유원지로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방죽 주변은 정원석으로 쌓고 둑은 도로로 만들고 나무를 심으며 호수에는 물고기를 키우고 요릿집과 낚시터도 세울 계획을 짠다.

 하지만 이런 계획마저 목전의 다른 이익 앞에 덧없이 밀려난다. 당시 인구 5만의 광주가 향후 20여년 안에 30만 명으로 늘 것이고 그러면 주택부지가 턱없이 부족할 테니 일찌감치 방죽의 일부를 메워 택지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방죽의 1/3만 놔두고 나머지는 매립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결정은 1939년 도시계획으로 확정되기에 이르렀고 실제로 그렇게 실현돼 경양방죽이 부분 매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나마 60년대 완전 매립된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당시 사람들은 반쪽짜리나마 경양방죽을 볼 수 있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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