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중국인들

▲ 1946년 학동에서 한 농부가 거름 주고 있는 모습.

 1965년 3월1일 산수동의 왕용경(王龍慶) 노인에게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던 터라 노인은 평소 석유등을 켜놓고 생활했다. 그런데 켜놓은 석유등이 넘어지면서 허름한 초가집 전체가 불에 타면서 그 안에 있던 노인도 변을 당했던 것이다. 당시 노인의 나이는 77세. 고향은 중국 산동성, 즉 화교였다. 1930년대 광주에 와 평생 채소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이 날 생을 마감했다.

 임진왜란 이후로 광주전남지역에 중국인들이 공식적으로 발을 대딛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1890년대였던 것 같다. 처음 정착한 곳은 아무래도 목포와 같은 항구도시였다.

 초기 그들은 주로 장사를 했다. 1924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에 있어서 지나인(지나인은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을 낮춰 부르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자료의 역사성을 고려해, 원제목 그대로 밝혀둔다)’이란 책에는 1893년 중국 상인 강만의(姜萬宜)와 학경해가 산동성 지부(현 엔타이의 옛 이름)에서 목포에 와 ‘영성인호(永盛仁號)’란 상호로 점포를 낸 것이 광주전남에 중국인들이 온 시초라고 했다.

 

 최초 중국인 1890년대 목포에 발딛어

 

 그러나 다른 자료를 보면, 중국인들은 그보다 더 앞서 광주·전남에 왔을 가능성도 있다. 규장각에 소장 중인 ‘전라도관초(全羅道關草)’ 1892년 7월 19일자를 보면, 전라도 광주 서촌면 덕산리, 즉 지금의 광주 서구 유덕동 덕흥마을에 사는 오영호(吳永浩) 부자와 오도관(吳道觀)이 중국 상인 천진태(千眞泰)에게 돈을 빌렸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후 1910년대부터 점차 광주와 같은 내륙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2012년 노혜진이 광주지역 화교자료를 토대로 발표한 논문인‘차별과 타자화 속의 한국 화교의 정체성’(전남대 석사학위논문)을 보면 1910년대 한반도에는 1만여명의 중국인들이 들어와 살았고 광주에만 100명에 육박하는 중국인들이 와 있었다.

 이처럼 1890년대에 비해 내륙 깊숙한 곳까지 적잖은 중국인들이 이주, 정착한 배경은 무엇일까? 필자의 생각에 광주에 온 초기 중국인들의 상당수는 1910년대 시작된 호남선 등 철도공사와 건축붐에 이끌러 왔다가 잔류한 듯하다. 하지만 그들이 이런 공사가 끝난 뒤에도 정착생활을 계속하는 데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했다. 연고도 없고 별다른 밑천도 없었던 그들 중 일부는, 그래서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농토를 가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도시 근교의 버려진 땅을 밭으로 개간했고 채소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곧 채소농사의 달인임을 입증했다.

 채소농사가 별 대수이겠냐 싶겠지만 사실 채소재배엔 많은 비료가 필요로 한다. 화학비료가 흔치 않던 시절에는 분뇨가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만 해도 조선인들은 분뇨를 밭에 뿌려 채소를 짓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분명 필자처럼 대학에서 분뇨나 두엄을 이용해 농사짓는 법이 조선후기에 아주 일반화됐다고 배운 사람들에겐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당시 이들의 삶을 목격했던 광주지역 어느 원로의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배운 것과는 사뭇 달랐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분뇨를 이용한 채소농사를 처음 시작한 건 중국인들이었다고 한다. 조선인들 중 분뇨를 비료로 사용하는 사람이라도 자기 집에서 나온 것을 쓰는 정도였지, 중국인들처럼 시내를 돌며 남의 집 분뇨까지 퍼다 가 밭에 뿌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과연 그랬을까 싶으면 1924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부락조사보고’ 제1책 중 ‘내주지나인(來住支那人)’항목을 찾아볼 필요도 있다. 이 책에는 당시 한반도에서 생활하던 중국인들이 채소재배에 성공한 몇 가지 비결을 소개하고 있다.

 

 중국인 덕에 알게된 결구배추

 

 이 책에 따르면, 첫 번째 성공비결은 근면이고, 두 번째 비결은 집약적 농업이었다. 이를테면 채소 재배 때 사용하는 비료의 경우, 조선인들은 자기 집의 분뇨에만 의존하지만 중국인들은 값을 치르더라도 시내 분뇨를 거둬 비료로 사용하고 돼지를 기르는 목적도 이런 분뇨 비료를 얻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앞서 광주의 원로가 해준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는 기록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에게 놀라운 점은 채소 재배에 아주 능숙하게 분뇨를 사용한다는 점 외에 그들이 재배하는 채소의 종류도 다양했다. 앞서 언급한 광주의 원로에게 우리가 요즘 흔히 보는 결구배추를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냐고 묻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일제강점기 때 중국인들이 재배하면서부터였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엔 조선인들이 먹던 배추는 어떻게 생긴 것이냐고 묻자 “잎이 되바라진 조선배추”뿐이었다고 했다.

 비록 그 뒤 결구배추의 품종을 여러 번 품종개량을 해서 광주 같은 지역사회에 퍼졌겠지만 이 증언대로라면 중국인들 덕분에 우리가 결구배추를 알게 된 셈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채소농사에서 중국인들의 역할과 비중은 꽤 컸다. 그 뒷얘기는 다음에 계속하기로 하자.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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