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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갈피갈피]우리 현대사가 외면한 중국인들
광주의 중국인들Ⅲ
조광철
기사 게재일 : 2017-06-21 06:00:00
▲ 광주공원 현충탑. 이 탑은 1963년에 건립돼 2015년에 철거됐고 현재는 다른 탑이 서 있다.
 2012년 여수 해양엑스포가 열리던 해에 개봉된 영화 ‘신세계’에는 여수 출신의 두 화교 청년, 즉 정청(황정민 분)과 이자성(이정재 분)의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다큐가 아닌 까닭에서인지 이 영화에선 이들이 어떻게 여수에 살게 됐는가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는다.

 1920년대 후반 여수에는 한꺼번에 1200명이나 되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당시 여수시내 인구가 2만 명 정도였고 막일꾼들이 500명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하면 꽤 많은 숫자다. 이들이 여수에 온 것은 오늘날 경전선 일부가 된 광주~여수 간 철도(당시엔 이를 ‘광려선’이라고 했다) 부설공사 때문이었다.

 물론 철도공사에 일할 인력은 국내에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중국인들이 톈진 항을 출발해 서해와 남해를 돌아 여수까지 온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터널 굴착과 석축작업 등 남들이 꺼려하는 일에 이들만큼 잘 해낼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들, 막일꾼 하러 여수까지 원정

 이런 이유로 1930년대까지 중국인 노동자들은 광려선 철도공사, 해양엑스포가 열린 여수 신항 매립, 자산공원에서 오동도를 잇는 방파제 축조, 그리고 보성 득량만 방조제 공사에도 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과의 갈등이 없지 않았다. 1929년 5월 그들이 여수에 상륙했을 때 한국인들은 일감을 빼앗길까봐 걱정스런 눈길로 그들을 지켜봐야 했다. 득량만 방조제 공사 때는 함께 일하던 한국인들과 충돌을 빚었다. 하지만 광려선 철도공사 때에는 일본인 공사 청부업자가 임금지급을 미루자 한국인들과 함께 동맹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여하튼 1930년 광주~여수 간 철도공사가 마무리 된 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여수를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여수의 인구통계자료를 보면, 중국인의 숫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신세계’ 속의 화교들이 여수의 철도건설공사에 온 중국인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중국인들이 우리 지역에 끼친 영향을 그려보는 데는 얼마간 도움을 준다.

 사실 중국인들은 일제강점 초창기부터 우리 지역의 건설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1910년대 호남선 철도 부설공사에 이미 많은 중국인들이 참여했다. 지금은 고속철 개통으로 노선이 바뀌는 바람에 사용하지 않지만 노령산맥 아래로 정읍과 장성을 잇는 옛 노령터널이 있다. 이 터널을 뚫은 사람들도 중국인들이었다. 아마도 발파작업, 그리고 터널 안쪽에 마감할 벽돌을 쌓는 일이 당시 한국인들에겐 낯설고 서툰 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도맡다시피 이 일을 했다. 노령터널 외에 다른 사례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건설된 호남선의 다른 터널들도 상황은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박선홍 선생의 ‘광주1백년’에 따르면, 1920년대에 신축된 충장로3가의 호남은행 본점이나 대의동의 금융조합 전남지부 건물은 모두 벽돌건물이었는데 이들 신축공사에도 중국인 노동자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음식점 경영 중 학생운동 도운 중국인

 이렇게 광주전남에 온 중국인들은 공사가 끝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철새처럼 다른 공사판을 전전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광주에 남거나 광주로 이주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려나갔다.

 1920년대 말엽 광주에는 약 300명의 중국인들이 살았다. 그들은 여러 직종에 종사했고 그중 하나가 음식점 경영이었다. 1950년대 제작된 ‘이름 없는 별들’이란 영화가 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소재로 만든 영화인데 상당부분을 광주시내에서 촬영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영화엔 학생들이 거사를 준비하면서 중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을 비밀회합장소로 이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중국인 주인은 학생들에게 편의를 봐준다. 이 장면은 실제 있었던 일을 근거로 한 것인데 당시 학생들이 출입했던 중국인 음식점은 황금동의‘연빈루’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음식점의 중국인 주인장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연빈루 주인뿐 아니라 많은 중국인들이 광주에 살며 나름대로 광주의 현대사를 써나갔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대부분 잊고 있다. 그렇게 잊혀져간 인물 중에는 왕수지(王守志)란 사람도 있다. 산둥성 출신인 그는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6년 한국에 왔다. 그리고 충장로5가의 옛 조흥은행 오른편에 ‘중흥루’란 간판을 내걸고 제법 큰 중국음식점을 운영했다. 여기서 쌓은 재력으로 그는 광주시내 화교학교 운영에도 적잖은 기여를 했고, 1966년에는 서울에서 ‘화한신문’이란 이름으로 화교신문도 발행했다. 동생인 왕수례도 광주에서‘신성장유공장’이란 간장제조업체를 경영했다.

 광주지역 화교대표이기도 했던 왕수지는 1959년 태풍 사라호 때 거액의 의연금을 냈고, 1963년 광주공원에 현충탑을 건립할 때에도 상당한 돈을 기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현충탑은 2015년 헐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현충탑이 건립됐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1963년의 건립 헌금자였던 왕수지의 이름에 대한 기록은 없다. 광주가 기억해야 할 내국인들이 너무 많아서일까?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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