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폭우 속에서…과거 광주의 여름

▲ 1910년 경 광주천.
 광주공원 앞 천변좌로엔 석서정(石犀亭)이란 자그마한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2006년에 건립한 것이지만 사실은 고려시대 말엽 이색(1328∼1396)이란 사람이 쓴 ‘석서정기(石犀亭記)’란 글에 근거해 세운 것이다. 원래 석서정은 광주천 가운데 형성된 하중도(河中島) 안에 있었다. 1380년대쯤 광주목사로 와 있던 김상(金賞)이란 인물이 광주천 치수사업을 한 기념으로 건립했던 것이다.

 당시 광주천은 지금과 달리 삶에 대단히 위협적인 하천이었다. 툭하면 범람을 일으켜 주변 농경지와 민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곤 했기 때문이다. 이를 보다 못한 김상이 지금의 서석교 일대(옛 기준으로는 조탄보 일대)에서 광주천의 물길을 둘로 나눠 하천 유수를 분리했다.

 그런데 이런 시도는 그전부터 있어왔는데 ‘석서정기’에 따르면, 학동 일대의 ‘원지교’나 ‘원머리마을’이란 지명의 연원인 된 분수원(分水院)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여하튼 김상의 노력 덕분에 광주천의 범람 피해가 다소 완화됐지만 그렇다고 자연의 위력을 완전히 굴복시킨 것은 아니었다. 범람의 두려움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툭하면 범람 광주천, 두려움의 근원

 한때 광주에서 살았던 민제인(1493~1549)이 남긴 시 ‘남계(南溪)의 범람을 보며’엔 범람의 두려움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장대 같은 비가 앞 계곡을 채우고도 넘치니 / 엄청난 물살이 들녘으로 흘러드네 / 그 모습 산을 품고 달리는 수백 마리의 말과 같고 / 물살과 맞부딪치며 돌에선 우레 같은 소리가 나네 / 아무리 큰 낚싯대라도 속절없이 부러질 기세 / 작은 배의 노쯤은 거뜬히 부러뜨릴 듯 / 온전한 것은 새 한 마리와 나뿐 / 이 격류에 어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음 졸이네”

 민제인은 1520년대 광주에 유배를 왔다. 김상이 광주천 치수 사업을 한 뒤 140년이 지난 뒤였다. 하지만 범람의 두려움은 여전했다. 물론 민제인이 본 남계가 광주천인지는 불분명하다. 현재 남계란 이름을 가진 계곡이 없어 더욱 그렇다. 그래도 광주시내와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하천임엔 분명했다.

 장마철이면 매번 맞닥뜨려야 했던 이런 격류는 항상 광주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광주천엔 수십에 개의 번듯한 다리들이 하천 위를 가로질러 놓여 있지만 20세기 초반까지도 그 하천 위로 변변한 다리 하나를 놓지 못했던 것도 이런 격류, 정확히 말해서는 격류로 인한 유실 위험 때문이었다.

 

 우곡·천정천…격류가 만든 경관들

 이런 격류는 광주에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1960~70년대 도시개발로 복개되어 사실상 우리에게 잊혀진 동계천(東溪川)이 그것이다. 이 소하천이 격류와 관련을 맺은 것은 20세기 초엽만 해도 광주 일원에 흔했던 민둥산 때문이다. 1910년대 광주의 산 중 숲으로 뒤덮인 면적은 고작 24%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86%의 산은 어린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거나 아예 벌건 흙을 드러낸 산이었다.

 이처럼 황폐한 산림 탓에 폭우가 내리고 나면 빗물이 씻겨 내려간 자리엔 V자 형태의 작은 계곡인 우곡(雨谷)이 생겼다. 1917년 제작된 지형도를 보면, 광주 일원의 산이나 언덕에 이런 우곡이 무수하게 표시돼 있음을 볼 수 있다(우곡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고 싶다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거나 수 킬로미터의 먼발치에서도 확연하게 눈에 띄는 광산구 평동의 포 사격장의 우곡을 보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 폭우가 내리면 하천엔 물만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빗물을 따라 흙과 자갈도 함께 흘러내렸고 그 바람에 하천 바닥은 해마다 높아졌다. 물론 사람들은 범람을 막기 위해 그때마다 높아진 하천 바닥을 퍼 올려 제방을 쌓았다. 그래서 얼마 뒤엔 제방이 주변 농경지보다 높아졌고 덩달아 하천 바닥도 높아져 이른바 천정천(天井川)을 이루었다. 장원봉 일대에서 발원해 광주시내 북쪽을 관통해 서쪽으로 흘렀던 동계천이 꼭 이런 천정천이었다.

 이런 사실은 1904년 일본인들이 견문한 기록을 바탕으로 쓴 ‘한국토지농사조사보고’나 1910년대 지형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동계천은 발원지에서 동명동까지는 주변보다 낮은 보통의 개울 형상을 이루었지만 동명동을 빠져 나가면서부터는 전형적인 천정천 모습을 띠었다. 이후 동계천 중 이런 천정천을 이룬 구간만 10킬로미터나 됐다. 그리고 이렇게 들판을 가로질러 놓인 동계천의 제방을 본 일본인들은 그것이 마치 성벽이나 철도 둑처럼 보였다고 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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