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항상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 1960년대 무등산.
 16세기 광주를 묘사한 그림으로 `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란 작품이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1567년. 이 해 광주목사 최응룡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동기생들을 광주의 희경루에 불러 연회를 베푼 장면을 담고 있다. 연회의 무대인 희경루는 충장로2가의 옛 광주우체국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누각은 1451년에 처음 건립됐다. 신숙주의 `희경루기(喜慶樓記)’에 그 건립과정에 대한 상세한 얘기가 나온다. 건물은 남북으로 5칸, 동서로 4칸이었다고 한다. 꽤 웅장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광주에 온 사람들은 누구나 이 누각에 올라 시 한 수쯤을 짓는 것이 관례처럼 됐다.
 
 희경루 재건축엔 무등산 목재 안 쓰여
 그런데 `방회도’에 묘사된 희경루는 사실 1451년에 처음 건립됐을 때의 모습이 아니다. 중간에 화재를 입어 1534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이 때의 일은 1536년 심언광이 쓴`희경루기’란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글의 중간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희경루 재건축에 필요한 목재는 강진현 완도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 무렵 완도는 강진에 속했다. 완도가 강진에서 독립한 것은 1896년의 일이다. 여하튼 눈길을 끄는 것은 희경루 목재의 원산지가 완도였다는 사실이다. 광주와 완도가 몇달음에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그랬다는 것이다. 이 말은 희경루 재건축에 들인 공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동시에 당시 광주 인근, 특히 무등산에서는 희경루를 다시 지을 만한 목재가 나지 않았다는 말인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무등산은 지형상 울창한 숲이 형성되기 어려운 조건을 가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무등산이 원래부터 숲이 부실했거나 황폐한 산이었던 것은 아니다. 1570년대 고경명이 무등산을 오른 뒤에 남긴 기록인 `유서석록(覽瑞石錄)’을 보면, 16세기에 무등산이 황폐한 산이었다는 언급이나 정황은 없다. 오히려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일렬로 산에 오르고 맹수를 걱정했다는 말로 봐 당시 숲이 꽤 울창했을 것으로 상상하는 쪽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심언광의 말을 존중한다면 무등산의 특성상 2층 누각 1채를 짓는데 필요한 굵직한 나무를 얻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산, 어쩌면 연약한 산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연약한 산이라도 인간의 손길이 미친 이유
 더구나 무등산의 숲은 끊임없이 인간의 간섭을 받았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벌목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광주엔 목재 수요가 급증했다. 17세기에 광주목사를 지낸 홍명원의 `하모당기(何暮堂記)’를 보면, 전란 이후 광주관아가 불에 타거나 피폐해진 공공건물을 재건축하느라 많은 노력을 경주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 나온다. 옛 전남도청 맞은편, 지금의 상무관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모당의 건립 역시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광주읍지’엔 17~18세기에 수십 채의 관아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축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십 채는 200년이란 긴 기간에 지어진 건물치고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록엔 수없이 되풀이 된 개축이나 수리 사실이 빠져 있다. 실제로 19세기 말엽에 작성한 `광주목중기(光州牧重記)’란 자료엔 관아건물이 얼마나 자주 개축되거나 보수됐는가를 말해준다. 광주읍성의 남문에 해당하는 진남문의 경우에 1838년부터 1887년까지 50여 년 동안 네 차례나 문루를 고치는 대형 공사를 했다. 그 중 1849년엔 거의 새로 짓다시피 한 일도 있었다. 동문이나 서문, 북문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했을 것이다. 또 1887년엔 한 해 동안 객사, 동서남북 4개 문루, 공북루 등 시내 전역에 있는 스물일곱 건의 공공건물을 수리한 일도 있었다.

 공공기관만 목재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 민간에서도 목재 수요가 급증했다. 특히 17~18세기에는 이름난 조상을 선양한다며 가문들이 경쟁적으로 서원과 사당을 건립하거나 확장했는데 월봉서원, 포충사, 의열사, 편방사(경렬사), 운암사(운암서원) 등이 그것이다.
 
 건축으로 땔감으로 훼손당한 숲
 건물을 짓고 고치는 일은 언제나 있어왔던 일이다. 문제는 이런 일이 특정기간에 집중적으로 일어났을 때 숲이 큰 압박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밥을 짓고 방을 덥히는데 필요한 연료림의 수요는 늘면 늘었지 결코 줄지 않았다.

 그 결과, 19세기 이르면 무등산의 황폐화는 누가 봐도 뚜렷한 상황이 됐다. 1860년대 무등산에 올랐던 나도규는 해발 400미터 능선에 있는 천제단(天祭壇)에 이르렀다. 광주사람들이 큰 가뭄 때면 매번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였다. 그래서인지 제단 주위엔 제법 아름드리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숲은 그가 산을 오르면서 봤던 광경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채로운 느낌을 주었다. 산길을 타고 오는 동안에 이만한 숲을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본 나무란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기 어려운 바위나 절벽 틈 사이에 있는 다복솔 정도였다. 그래서 천제단 주변의 숲이 더 확연히 눈에 띄었던 것이다. 숲은 항상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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