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택한 천한 생업

▲ 시문마을은 `장문터’라고도 한다. 담양군 남면에서 화순군 이서면으로 가는 길가에 있다.
 요즘 이런 말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조선시대에 장사는 말업(末業)으로 간주됐다. ‘사농공상’의 신분제도에서 맨 아래쪽에 있던 직업이었다. 이때 말업이란 말에는 가장 천한 생업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동시에 이 말에는 다른 일을 해서는 도저히 입에 풀칠을 하고는 살 수 없는 경우, 최후에 선택하는 생업이란 의미도 있다.
 
 장사, 사농공상 신분제도 맨 아래

 역사상 생계의 최후 수단으로 말업을 택한 사람들은 많다. 고구려의 미천왕은 젊은 시절에 머슴살이를 거쳐 소금 장사를 했다. 백제의 무왕은 어린 시절에 과부 어머니를 모시도 마를 캐서 팔아 생계를 이었다. 그를 부르던 별명인 ‘서동’은 마를 파는 아이란 뜻이었을 것이다. 신라시대 말기 지금의 전북 익산 땅에서 태어난 혜소 스님도 출가 전에 가난 때문에 부모를 제대로 봉양할 수 없어 생선을 팔았다고 하동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 탑비’와 그 비문을 쓴 최치원의 문집 ‘고운집’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고대인들이 조선시대 사람들처럼 장사를 말업으로 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도저히 농사로는 먹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선택한 직업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던 것 같다.

 그런데 별다른 생계방편을 구할 기회가 없어 부득이 장사에 뛰어든 경우라도 장사를 대하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태도는 분명 차가웠다. 하다못해 장사의 길에 들어선 사람을 보면 어떤 연민이나 동정 같은 것을 느꼈을 따름이지 장사로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많지 않았다. 한말 때 구례 운조루 주인이 쓴 일기를 보면, 섬진강을 오르내리며 장사로 생활하는 집안사람을 그런 눈으로 봤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있다. 비슷한 시기, 광주 칠석동 사람들이 모여 작성한 향약의 규약 중에도 양반으로 장사를 해서 먹고살아야 하는 것도 서러운데 양반 출신 장사꾼을 마구대하는 불한당들을 관아에 고발해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적었던 것도 장사를 자존감 상실의 극한 처지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장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생업전선의 마지막 보루로 택해온 직업이다. 1ㆍ4후퇴 당시 흥남부두 피난민의 얘기를 담은 영화 ‘국제시장’을 복기할 것도 없다. 광복 직후 귀국한 동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봐야 한 뙈기의 전답도 없을 때 택한 것은 장사였다. 그런 귀국동포들이 모여 살았다는 광주 학동의 옛 백화마을 사람들의 주요한 생업거리도 역시 장사 아니면 날품팔이였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금동시장이나 양동시장에서 생업을 잇던 분들도 상당수는 이런 이유로 장사에 뛰어들었다.

 기근해소 위해 존속됐던 상거래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에 ‘장’이라는 현상이 출현한 상황도 비슷했다. 장이 맨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470년을 전후로 한 시기였다. 그 무렵 전라도 땅엔 큰 기근이 들었다. 기근이 얼마나 심했던지 부모가 자녀를 버린 일도 많았다. 그렇다고 다들 이런 극단적인 결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장사를 시작했고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날에 만나 정기적으로 상거래를 했다. 그들이 무엇을 내다팔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가재도구를 팔아서라도 식량을 구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기회와 장소를 마련함으로써 가만히 앉아 굶어죽기만을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다.

 전라도 사람들이 발명한 이 놀라운 상거래 방식은 실제로 기근해소에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장의 출현 직후 장이 도둑들에게 훔친 물건을 처분하는 장소로 이용된다느니, 물가상승의 원인이 된다느니 하는 이런저런 이유로 폐쇄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럼에도 당시 전라도에 있던 지방관들이 한사코 그 효용성을 들어 장의 존속을 주장했던 것은 장이 기근해소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는 점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여곡절 속에서 장은 빠른 속도로 영산강을 따라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됐다. 1470년 처음 영산강 하류인 무안에서 출현한 장은 몇 년 만에 그 상류인 광주와 나주 땅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 백 년 뒤 이제는 꼭 기근 때문만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로서 전국 팔도엔 1000여 개의 장이 운영됐다.
 
 옛 장의 이름을 간직한 지명들

 오늘날 장이 전라도 사람들의 발명품이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장이 처음엔 ‘시문(市門)’이나 ‘장문(場門)’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은 더 더욱 잊혀진 상태다. 그런데 아직 장의 옛 이름을 간직한 곳이 있다. 담양군 남면 정곡리에 가면 ‘시문’또는 ‘장문터’란 동네가 있다. 영암군 신북면 갈곡리에도 ‘장문터’란 지명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들 동네에 언제 장이 서고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장이 처음 생겨난 고장답게 전라도에 옛 장의 이름을 간직한 곳이 지금껏 있다는 사실은 묘한 여운을 준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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