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 또 다른 기원, 물가 시장

▲ 나주 좌창포구. 1970년대까지 생선과 젓갈을 실은 장삿배들이 이 포구에 머물곤 했다.
 다음의 글에 대한 설명으로 바르지 못한 것을 하나 골라보세요.

 “장삿배들이 모이는 곳으로 돛대가 연이어 있고 사람들이 수없이 왕래하며 물건을 사고팔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지명)이 붙었다.”

 ①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나오는 충청도 은진현에 대한 설명이다.
 ② 은진현은 덕은군과 시진현이 합쳐져 생겼다.
 ③ 여기서 말하는 시진은 ‘관촉사 미륵불’과 가까운 곳이다.
 ④ 시진(市津)이란 지명은 1470년 전라도 땅에서 장이 출현한 뒤에 생겼다.
 
 정답은 ④번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오늘날 충남 논산시 은진면 일대를 가리키는 시진은 백제 때 ‘가지내’ 또는 ‘가을내’, 신포(新浦)라 부르다가 신라 경덕왕 때인 750년대에 시진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장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시진은 배가 드나들고 상품이 거래되는 장소로 성가가 높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의문이 든다. 적어도 8세기 물가에서 이런 교역이 활발했다면 왜 장이 출현하기까지 무려 700년이나 걸렸던 것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애초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해였을 것이다. 필자가 왕왕 이발을 하러들르는 미장원 주인은 머리를 손질하는 내내 얼마 전 친정인 강진에 갔다가 어물을 싣고 포구에 들어온 어선을 만나 값싸고 신선한 어물을 잔뜩 사왔다며 자랑을 했다. 이런 어선은 잡은 물고기를 위판장 대신에 직접 포구를 돌며 판다고 했다. 필자도 그럴 기회를 얻을 수 있느냐 했더니 이런 어선은 딱히 정해진 날짜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운이 좋은 외지인이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만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부정기적으로 열리는 물가 시장이었던 셈이다.
 
 ▶江市·浦市·海市·水市…

 이런 부정기적인 물가 시장은 조선시대에도 아주 흔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17세기 조경이란 사람의 시엔 “강가 시장에 사람들이 흩어지자 어부는 그물을 거두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강가 시장을 그는 강시(江市)라고 표현했다. 반면에 19세기 사람인 한장석은 한강을 배경으로 한 시에서 “장삿배들은 총총히 용산과 마포의 시장에 모이고 조운선들마다 영호남의 깃발이 펄럭이네”라고 했는데 원문엔 시장을 포시(浦市)로 적었다. 드물게 이런 물가 시장을 해시(海市)라고 표현한 경우도 보인다. 하지만 해시가 보통 신기루를 뜻할 때 사용되는 단어라 자주 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수시(水市)란 표현도 자주 보인다. 15세기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김종직이 나주객사 앞 망화루에 올라 읊은 시, 17세기 이식이 강원도 간성의 바닷가와 평양의 대동강을 노래한 시, 그리고 19세기 강진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정약용이 한강변의 고향에 머물면서 지은 시에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이름으로 불렸건 물가 시장은 은진의 옛 이름이 시진이라 부를 만큼 오래됐고 필자가 만난 미장원 주인이 경험한 것처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장의 출현과정과 관련해 물가 시장이 장으로 진화했다고 단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만일 그랬더라면 시진이 있던 충청도 같은 곳에서 먼저 장이 생겼어야 맞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진화론을 설명하며 원숭이가 진화해 사람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사람과 원숭이의 먼 조상으로부터 일부는 원숭이로, 일부는 사람으로 진화했을 따름이다. 그렇게 진화의 줄기가 갈려지면서 원숭이와 사람은 ‘넘사벽’이 됐다. 같은 뿌리에 나왔지만 전혀 다른 모습이 됐던 것이다. 물가 시장과 장의 관계도 비슷한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영산강 1980년대까지 물가시장 흔적
 
 물가 시장이 장보다 훨씬 전부터 등장했지만 그중 일부만이 정기시장, 즉 장으로 진화했다. 대부분의 물가 시장은 계속 물가에서 부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으로 남았고 아마도 이 땅에서 오일장이 완전히 사라지더라도 계속 살아남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앞으로도 정기시장으로는 진화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출현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듯 물가 시장의 존재를 무시하고는 장의 출현을 생각하기 어렵다. 1470년 전라도 무안 땅에서 하필 장이 처음 등장했던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충청도의 시진처럼 장의 출현에 앞서 물가 시장이 성행했을 개연성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정기 시장을 정기시장으로 만든 것은 전라도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장의 태생지 또는 요람이라 일컬어지는 영산강은 1980년대 하굿둑이 준공되기 전까지 물가 시장의 전통이 이어져왔다. 2012년 필자가 영산강변을 따라 몇몇 강변마을을 들렀을 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하굿둑이 생기기 전까지 신안과 진도, 완도, 심지어 옹진군 대청도에서 해산물을 싣고 와 식량과 맞바꿔 가던 어선과 장삿배 얘기를 숱하게 들었다. 그렇게 물가 시장은 번창했다. 이를 통해 강변 사람들은 진귀한 소금과 강달이(일명 조기 새끼), 미역과 젓갈을 구했다. 500여 년 전 사람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물가 시장은 굶주린 강변 사람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물가 시장은 장의 태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열쇠 중 하나일 지도 모른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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