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가 성밖으로 나간 건, 장 때문?

▲ 1900년대로 추정되는 시리의 모습. 시리는 광주 최초로 장이 섰던 동네로 지금의 충장로4가 일대를 가리킨다. 사진 전면에 보이는 건물은 광주읍성의 북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4년(1473) 기록에는 1470년 전라도 무안 땅에서 처음 ‘장문(場門)’이란 이름으로 장이 열렸다는 신숙주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생겨난 장은 점차 영산강 상류 쪽으로 확산되어 갔다. 1480년대 전라관찰사 김종직은 나주객사 앞 망화루에 올라 쓴 시에서 영산강변에 열리는 물가 시장인 수시(水市)를 언급했다. 비슷한 시기 이예라는 사람은 나주의 풍속을 거론하면서 “이곳 사람들이 점포를 열어 장사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광주엔 언제부터 장이 섰을까?

 광주에서 장의 시작을 다룬 기록은 없을까? 엉뚱하게도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게 끌려가 귀국해 ‘간양록’을 쓴 바 있는 강항의 글,‘광주향교상량문’에서 그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이 글에서 강항은 권수평이 광주의 원님으로 있을 때인 1488년 서문 밖, 즉 지금의 광주공원 옆으로 옮기기 전까지 향교가 광주읍성 안에 있었다는 말을 전한다. 향교가 한때 성 안에 있었다는 이 말은 강항이 처음 한 것은 아니다. 강항보다 앞 시기에 살았던 기대승도 같은 얘기를 했다. 그리고 기대승이 살던 시대보다 더 앞서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광주향교가 한때 성 안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488년 성 주변에 장이 섰을 것”

 그렇다면 성 안 어디에 향교가 있었던 것일까? 1952년에 편찬된 ‘광주향교지’엔 향교가 동문 안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믿을만한 것일까? 필자의 생각엔 믿을만하다고 본다. 1900년대에 작성된 ‘조선지지자료’을 보면 광주군 성내면 ‘사정리’라는 동네에 ‘고향교평(古鄕校坪)’이란 들이 있다고 적고 있다. 예전 향교가 있던 곳이란 의미다. 이 기록은 기대승의 기록에 향교를 성 안에서 서문 밖으로 옮긴 뒤에 그 원래 터를 밭으로 만들어 경작했다는 내용과 부합한다. 그리고 ‘사정리’란 동네는 동문 안에 있던 동네였으므로 ‘광주향교지’이 기록한대로 향교는 동문 안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시 강항의 글로 돌아가 보자. 강항은 성 안의 향교가 서문 밖으로 이전한 배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성 안에 향교가 있다 보니 이익을 다투고 잡인들이 음주가무를 즐기며 기름 바른 여자들이 사람들을 현혹하는 등 장과 가까워 도저히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라 향교를 성 밖으로 옮기게 됐다고 적었다.

 이 글을 광주에서 장의 태동이란 주제에 초점을 맞춰 보면, 1488년에 이미 광주에서는 장이 섰다는 얘기다. 그런데 동문 일대에 장이 있었다는 기록이나 구전은 없다. 따라서 장은 성 주변 어디일 것인데 그 장소는 북문 밖인 지금의 충장로4가 일대인 듯하다.

 충장로 4가 일대에서 장 태동

 충장로4가, 즉 충장파출소 맞은편 일대의 옛 지명은 시리(市里)였다. 장이 선 동네란 뜻이다. 이 지명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호구총수’란 책이다. 그 뒤인 1872년에 그려진 ‘광주지도’에도 이곳은 ‘시리’라 적었다. 하지만 이 지도엔 장이 우리가 알고 있듯 큰 장과 작은 장으로 나뉘어 있고 장터도 광주천 주변이라 시리에서 장이 섰던 것 같지는 않다. 실제 이 지도에 시리의 한자표기는 감나무 동네란 뜻의 시리로 바뀌어 있다.

 이처럼 처음엔 북문 밖에 섰던 광주장은 언제부터인가 두 개의 장, 즉 큰 장과 작은 장으로 나뉘었고 열리는 광주천 쪽으로 이전했던 것이다. 현재 그 시기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1872년 지도를 근거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동국문헌비고’란 책에는 18세기 후반에 이미 광주장이 큰 장과 작은 장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런 변화가 있던 것은 꽤 오래됐던 것 같다. 다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1470년대와 1480년대 사이 광주엔 이미 장이 열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 광주, 여덟 개의 장

 이후 광주에선 여러 장들이 생겨났다. 1770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엔 큰 장과 작은 장 외에 서창장, 대치장, 신장, 선암장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서창장은 지금의 서구 서창동에서 열렸고, 대치장은 지금의 담양 대전면 소재지에서 열렸던 장인데 조선시대엔 대전면이 광주에 속했던 터라 광주지역의 장으로 포함했다. 신장은 광산구 동곡동에서 나주 노안면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었다. 원래 여기엔 신원(新院)이란 주막이 있었던 까닭에 신장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선암장은 황룡강변인 지금의 광산구 선암동에서 열렸다. 장터 위쪽인 어등산 기슭엔 선암역이란 역참이, 강변엔 당시 나주 땅이었던 현 평동산단 북쪽을 잇던 나루터 덕분에 생긴 장이었던 것 같다.

 이외에도 ‘동국문헌비고’에는 지금의 광주광역시 행정구역 안에서 열린 장으로 박산장과 접의장을 소개하고 있다.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할 즈음 박산장은 조선시대엔 나주 땅, 지금은 광주 땅에 있었는데 필자는 현재 공사가 한창인 빛고을산단 부지 내 광산구 덕림동의 고암마을에 있었던 장으로 본다. 또 접의장은 조선시대 나주 북창(北倉)이 있던 광산구 산수동 용강마을에서 열렸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본다면 1770년대 광주지역에는 총 여덟 개의 장이 열리고 있었던 셈이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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