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랄 데 없는 만듦새…그러나 허무한 까닭

▲ 병조호란 당시 최명길을 연기한 이병헌(왼쪽)과 병조호란 당시 김상헌을 연기한 김윤석.
 병자호란은 조선왕조 오백년에서 가장 치욕적인 역사로 평가받는다. 인조 14년(1636년), 조선의 외교적인 조건은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번성하기 시작하던 때다. 이때 청은 조선에게 새로운 군신관계를 요구해 오지만 조선은 명과의 관계 때문에 청의 주문을 거절한다. 결국 청은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공격해온다. 이때 조선의 임금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지만 길이 막혀 실패하고,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그렇게 조선의 조정이 성 안에 갇혀 47일 동안 고립되었다가, 결국 청에게 굴복했던 역사가 바로 병자호란이다.

 이 치욕의 역사를 소설로 형상화시킨 작가는 김훈이다. 김훈은 ‘남한산성’을 통해 힘 있는 문장과 생생한 묘사로 1636년 12월에 시작되었던 47일간의 ‘추웠던’ 겨울을 상상해 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대규모의 제작비를 들여서 영화로 구현할 만한 이야기는 못된다. 그도 그럴 것이 ‘명량’과 같은 승리의 이야기도 아니고, ‘광해, 왕이 된 남자’와 같이 참신한 상상력의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라와 백성보다 자신의 안위를 걱정했던 임금과 청에 굴복하는 것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신하들의 말싸움은, 덩치 큰 영화의 소재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황동혁 감독은 김훈의 소설에서 영화적인 비전을 보았던 것 같다. 감독은 먼저 소설의 정서와 분위기를 살려내고자 공을 들였다. 을씨년스러운 겨울의 공기를 담아낸 미장센은 나무랄 데가 없고, 연기자들은 표정과 몸짓 그리고 발성을 통해 역사 속 인물들의 처지를 실감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원작의 색채를 잃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소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판서 최명길이 명분과 실리를 놓고 맞부딪히는 말의 향연을 공들여서 연출한다. 그러니까 김상헌(김윤석)과 최명길(이병헌)은 조선이 청에게 굴복하는 것을 놓고, 인조(박해일) 앞에서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자신들의 논리와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청의 굴욕적인 제안에 최명길과 김상헌의 논리가 팽팽하게 맞선다. 최명길은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고, 김상헌은 청의 치욕스러운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영화는 이 언쟁을 연출함에 있어서 두 사람 중 그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 오로지 두 사람이 자신의 논리적 정당성을 피력하는 말의 예스러움을 팽팽한 긴장감으로 지켜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는, 인조가 최명길의 의견을 받아들여 삼전도(조선 시대 서울과 남한산성을 이어주던 나루)에서 청나라 황제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으며 굴욕적으로 항복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렇게 ‘남한산성’은, 역사적 사료와 이를 근거로 형상화시킨 원작의 큰 얼개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영화는 청에게 무릎을 꿇었던 치욕의 역사를 구현하고 있는 것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이다. 심혈을 기울여 찍은 이 영화가 아쉬운 대목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던 조선은, 380년 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380년 전의 치욕에서 크게 배우지 못하고 오늘날에도 처량한 신세를 반복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역사는 변함없이 반복되고 있다. 이러할진대, ‘남한산성’은 수치와 모욕의 역사에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배울 것이 없는지를 살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삶을 구걸했던 임금과 대신들의 신음에만 집중한다. 굴욕의 역사를 오늘에 다시 만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 영화는 생략하고 있다는 말이다.

 ‘남한산성’이 만듦새에 있어 나무랄 데가 없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허무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대영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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